추천우수 수필

2016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비를 기다리는 마음 ㅡ제11회동서문학상동상/포옹 ㅡ손 훈 영

장대명화 2022. 3. 23. 01:53

                                      2016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ㅡ비를 기다리는 마음 /손 훈 영

 

두툼한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한다. 하늘의 허파가 용트림을 하며 강한 바람을 쏟아낸다. 번갈아 쉬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당장이라도 엄청난 비를 퍼부어 댈 것 같다. 비의 숨 냄새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비가 오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솟아난다. 드물게 몸과 마음이 활력으로 탱탱해진다. 오늘은 비의 예감만으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달릴 채비를 한다, 막힘없이 달려 보기에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가까운 인터체인지로 차를 올린다. 목적지는 없다. 비를 맞으며 실컷 달리다 그만 달리고 싶을 때 돌아오면 된다.

'비 탄다'는 말이 있다. 맑은 날과 비교해 비 오는 날의 심리상태가 유난히 다른 사람을 일컬을 때 스는 말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는 '습기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흘려 넘겨 버리는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쉽게 상처를 입는다. 꿈속에서도 줄곧 비가 내리고 찬란한 햇빛 아래서는 현기증을 느낀다.

빗줄기가 사다리처럼 하늘까지 이어진 날, 그런 날은 모든 것에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쨍한 햇살 아래서 악착같아지던 마음과는 대조적이다. 닿을 듯 가까워진 하늘이 강퍅하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팍팍한 마음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일 때가 더 평화 가깝지 않겠나.

자동차는 거침없이 달린다. 드디어 전면 창으로 빗방울이 투덕거린다. 아스팔트가 거뭇하게 젖어온다. 내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 안의 빗방울들은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에 이끌린다. 오랜 그리움 뒤 연인과의 해후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고 가슴 전체가 따뜻해져 온다.

대기를 장악한 빗방울들의 드라마가 풍성하다. 와~와 쏠리듯 다가와 파열하듯 강력하게 부서져 내린다. 녹음을 머금은 진초록 유리창 위로 방울방울 사념들이 매달린다. 온몸을 에워사는 빗방울이 혈관에 주입되는 링거액처럼 메마른 정신을 빠르게 타고 돈다.

맑은 날보다는 어둑시그레 비 오는 날이 더 좋은 것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정서 가운데 하나이다. 두 날의 심리적 대비가 너무 도드라져, 한때는 런던이나 파리나 뮌헨 같은 곳에서 살고 싶기도 하였다. 늘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자주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럽의 그 도시들을 동경해 보기도 하였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가로수의 춤은 더 격렬해진다. 서서히 타이어에 들러붙는 아스팔트의 질감도 달라진다. 차체와 도로가 한 덩어리로 밀착되며 어느덧 속도감마저 사라진다. 점차 우주적 진공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질구레한 잡념들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마침내 나는 느낌표 하나로 존재한다.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영화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만큼 비 또한 그렇다. 훌륭한 영화가 마음을 한껏 드높여 주듯 비도 정신과 영혼을 한 단계 상승시켜준다.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 그 이전과 달라진 자신을 느끼지 않는가. 그때의 고양된 느낌은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존재를 정화시켜 준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빗줄기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면, 와이퍼가 지나간 유리창처럼 말간 마음이 된다. 유난히 '비를 탄다'는 것은 남다르게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정화에의 요구가 유달리 강하기에 마음을 씻어 낼 수 있는 비 오는 날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마음의 정화 욕구가 남다르다. 그것은 그만큼 상처받기 쉬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상처의 파편들이 누구보다도 많기에, 그것들을 걸러 내는 작용이 더 자주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홀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환해져 온다. 동그란 핸들에 목숨을 얹고 어둑한 하늘을 향해 질주하노라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순하게 정리되면서 많은 것들로부터 초탈한 심정이 된다.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약하고 가뭇없는 존재들인지 뼛속 깊이 느껴지기도 한다. 풀과 같이 약한 생명이기에 지금, 살아서, 힘차게 내 심장에 대해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거대한 덤프트럭이 물세례를 퍼부으며 바짝 다가와 비켜 지나간다. 움찔하여 핸들을 다잡는다. 그렇다. 비 오는 날의 고속도로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확실한 긍정을 확인시켜 주는 공간이다. 시속 백 킬로미터의 속도감으로 펼쳐지는 비에 젖은 도로는 보다 더 본질적으로 살아갈 힘을 재생시켜 준다. 생명만이 진실이기에 누추한 욕심들이 떨어져 나가고, 검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향해 애틋한 마음이 된다. 비를 뚫고 도로를 가로질러 천천히 날아가는 흰 새를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하늘에 닿는 문장을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비를 기다린다. 햇빛 화창한 날에도 무슨 부적처럼 우산을 챙겨들고 간절히 비를 기다린다. 비는 보이지 않는 실존적 물음에 마음껏 탐닉할 수 있게 해 준다. 삶이 무엇인지, 답 없는 답을 찾기 위해 영화관을 찾고 도서관을 드나들며 온몸에 비의 지문을 찍으며 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예리한 비의 지문은 머릿속에 부식된 붉은 녹들을 벗겨내고, 가슴속의 두터운 지방질을 뚫어 초록빛 생명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나날의 상처와 황폐함에도 이어질 것이다. 폭력과 무관심이 도처에 횡행해도 불친절한 우리네 하루는 안이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 위로 오늘도 비가 내린다.

 

                                       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ㅡ포옹/손 훈 영

텅 빈 벽면에 흑백 사진 한 점이 걸려있다. 네 개의 팔로 세상의 위협과 폭력을 차단시키겠다는 듯 굳세게 끌어안고 있는 사진 속 두 남녀를 본다. 맞닿은 심장에서 솟구치는 힘찬 박동소리가 들린다. 그 박동소리에 몸을 실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는 듯 여자의 입가엔 희마한 미소가 서려있다.


이 방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서재라고 그냥 밋밋하게 부르기에는 방의 느낌이 너무 특별하다. 다갈색 벽지가 차분한 벽면을 따라 연한 검정 색깔의 나지막한 책장 두개가 이어져 있다. 그 앞으로 놓여 진 폭이 좁은 긴 책상이 책장과 맞춤인 듯 어우러진다. 책꽂이의 책들은 필를 나눈 혈육들처럼 다정히 포개어져 있다. 스틸 프레임이 심플한 데스크 탑과 하얀 색 복합기. 그것들이 이 방의 전부다.

세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다. 단지 장식을 위한 것이거나 눈에 거슬리는 물건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로만 채워진 방이다. 우리 집 전체로 봐서는 제일 작은 방이지만 작아서 그런지 가장 아늑하다.

혼자만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듯 긴 책상 앞에는 단 하나의 의자만 놓여있다. 그 의자에 깊숙이 몸을 부려 놓을 때면 태초의 자궁이 이럴까 싶게 방과 나는 완전히 밀착된다. 방 전체가 두 팔을 벌려 나를 보듬어 안는 듯한 포근함과 평안을 느낀다.

남편은 스스럼없이 포옹을 잘 하는 남자였다. 길에서건 음악 감상실에서건 나를 발견하는 순간 긴 팔을 동그렇게 벌리고 흔연히 웃어 오는 사람이었다. 반가움의 표시가 꽤나 서구적인 남자였다. 얼마간 내성적이고 소심하던 나로서는 그런 외향적이고 열정적인 인사법이 어쩐지 계면쩍고 쑥스럽기도 햇지만 환대로 열려진 그의 두 팔이 매번 감동적이기도 했다. 마악 연애가 시작된 청춘 남녀가 무얼 한들 감동적이지 않았을까마는 그의 사심 없는 포옹은 확실히 나를 사로잡은 결정적 무엇이 되어 주었다.

그의 가슴과 나의 얼굴이 맞닿은 잠시 잠깐, 그 사이로 건네져 오던 담백한 체온은 이 남자와 함께라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 같은 것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날깃한 셔츠에서 풍겨오던 빨랫비누 냄새는 검박함과 소탈함이 그의 정체성임을 느끼게 해 주었고 나의 등을 토닥이던 정다운 손바닥은 삶의 그 어떤 격랑이라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겠다는 믿음을 안겨주었다. 날밤을 새며 나누었던 수많은 말들보다 격의 없이 열려지던 그의 포옹에서 그와의 미래를 더 확신 할 수 있었다.

포옹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 사랑을 잘 베풀 수 있듯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받아들여져 본 사람은 다른 그 무엇인가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결혼 후 나의 나날들이 그러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남자로부터 전적으로 받아들여진 그 기억의 힘으로 어쩐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내 존재에 새겨진 그 따뜻한 느낌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죽도록 회피하고 싶은 혈육들을 끝끝내 져버리지 않게 해주었고 나 자신 짐승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토록 질긴 권태와 무기력 속에서도 자기응시라는 한 가닥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 보면 그 기억의 힘이었던 것 같다.

그와의 굳센 결속력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나는 굉장히 황폐한 인간이 되었을 것 같다. 그와 일군 이 아름다운 방에서 세상과 접속하고 있는 한갓진 시간을 결코 누리지 못했을 것 같다.

편집븡과 과대망상, 충동조절 기능이 망가진 혈육과 함께한 십 수년 세월은 문자 그래도 고통의 바다였다. 어떠한 논리나 개연성도 없는 동생 머릿속 온갖 망상과 환청의 뒤죽박죽을 멀쩡한 정신으로 감내해야 했다. 지치지도 않고 돋아나는 망상의 잡초들을 애정과 연민을 다해 뽑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동생이 쏟아내는 말도 안 되는 억측들을 일일이 바로 잡아 주려다보면 몸은 바닥없는 수렁으로 가라앉고 입에서는 독한 단내가 났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독 묻은 쇠사슬이 온몸을 죄어 오던 날들이었다.

누구보다 다감했고 긍정적이던 사람이 어둑하고 염세적으로 변하기에는 십년 세월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의무와 억압이 어떻게 한 인간을 망가뜨리는지를 내가 나를 보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주민등록을 말소 하고 먼 먼 이국으로 탈주한다는 계획은 내 이성을 갉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뿌리 뽑기 힘든 독버섯이었다.

완전히 움켜쥐기도 그냥 놓아버리기도 불가능한 뜨거운 감자 같은 시간들을 겪으며 운명을 한탄하는 나의 울부짖음을 지켜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결같이 묵묵히 나를 포옹해 오던 그의 두 팔은 격랑을 만난 뗏목처럼 요동치던 새 삶의 튼튼한 닻이자 방파제였다. 그의 전적인 포옹이 없었더라면 이미 나는 난파했을지도 모르겠다. 삶의 어느 외진 기슭으로 떠밀려가 참담하게 부식되어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방은 아늑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을 하고 있을 때처럼 외로움이 해소되고 불안감이 잠재워진다. 벽을 따라 놓여 진 자신들의 집에 편안하고 안전하게 자리 잡은 책들이 정답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는 가장 밀접하고 친근한 사물인 그들이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환대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들락거려도 내치는 법이 없다. 컴퓨터를 작동시킨다. 낡은 기계들 대부분이 그렇듯 켜자마자 우웅 소음을 뱉어낸다. 오래 길들여진 사물에서 나오는 소리는 정든 식구들의 숨소리 마냥 친근하다.

세상을 등지고 문을 닫아걸었던 시간의 갈피에 쌓인 묵은 먼지들을 털어 낸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책상 앞 의자에 깊숙이 엉덩이를 들이밀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는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과 교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책도 글도 아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방의 전적인 호의에 힘입어 한 편 두 편 글을 쓸 때마다 무겁게 닫아 두었던 육중한 문을 조금 열고 깨끗이 빤 속옷 하나를 내거는 기분이다.

'우웅~'하는 컴퓨터의 소음이 마치 먼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의 엔진 소리 같다. 그 소리는 나를 독려한다. 밀실에서 광장으로 한 발 내디디라고 주문을 건다. 끝없이 읽기만 하는 자폐적 만족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광장적 기쁨을 맛보라고 나를 부추긴다. 주저하지 말고 세상을 향한 화애의 기록물들을 던지라고 나의 등을 떠민다.

이 세상 어떤 공간이 있어 이 보다 더 나를 안정되게 감싸 준다는 말인가. 이곳은 높고 험준한 인생이라는 산을 오를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베이스캠프다. 이 방은 포옹과도 흡사한 가장 원초적이고 정서적인 어떤 것을 베풀어 줌으로써 나로 하여금 강력한 생의 에너지를 재생시킬 수 있게 하는 곳이다. 전적으로 나를 받아들여줌으로써 그 확고한 힘에 의지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방과의 완벽한 밀착감은 내 남자와의 굳센 결속과 함께 내 인생을 전진하게 하는 동력기의 양 날개다.

고통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행복과 기쁨도 잠시, 생이 우리에게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그것들의 극복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생의 이 험혹한 조건들을 어떻게 변주할 것이가이다. 다만 어둔 밤을 넘어지지 않고 더듬어 가는 법을 깨우쳐야하고 포기하지 않고 삶의 격랑을 타는 법을 배워야 할 뿐이다.

아직은 풍랑이 멈추지 않았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지만 포옹의 힘에 의지해 바람 부는 한 바다로 뛰어든다. 불안도 두려움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