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거울 / 변 종 호 (외6편)
구리거울 / 변 종 호
더 내려갈 곳 없는 바닥이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왜'라는 의문만 가득했고 흔들리는 정체성으로 방황했었다. 산다는 게 정말 힘겨웠고 입안으로 떠 넣는 밥조차 버거웠다.
혈기 넘치던 시기. 어디서든 열심히 하면 인정받을 거라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느꼈다. 늘 성실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가는 미흡했다. 매년 승진대상자로 추천되었지만 몇 해 고배를 마셨다. 후배조차 앞서자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를 볼 수 없으니 문제를 알 수도 분석을 할 수도 없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서운함으로 이어졌다. 속 좁은 마음에 학연도 지연도 없는 곳에서 일만 해서는 안 되는구나 여겼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자 넘치던 꿈과 열정은 사위어갔고 직장에 대한 회의懷疑만 늘어갔다.
자신의 겉모습이야 거울로 볼 수 있지만, 타인에 의한 자신의 평가는 알 수가 없다. 남들이 다 아는 나쁜 소문조차 정작 본인은 제일 늦게 안다는 사실을 피가 뜨겁던 그때는 전혀 몰랐다.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지독하게 몸을 혹사하면 뭔가 모일 줄 알았다. 작심하고 휴가를 냈다. 위험하다고 말리는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가장 험하고 긴 코스를 선택, 지리산 종주를 홀로 하며 발에 물집이 잡히고 퍼져 피가 나는 극한 산행을 하면서 나를 찾으려 들었지만, 몸만 고달팠지 옥생각은 여지없이 도돌이표만 찍고 말았다.
어느 날 '핵심사원 양성을 위한 의식고도화 과정'을 다녀오란다. 그럴싸한 타이틀을 들먹이며 수군대는 동료의 말을 귓전으로 흘렸다. 120명이 전국에서 입소하고서야 직장 내 눈엣가시를 위한 '지옥훈련''지옥훈련'인 줄 알았다. 절망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다 내가. 치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정규 지옥훈련을 이수했다는 교관들의 강렬한 눈빛은 쇠를 녹일 것만 같았다. '좀 봐주겠지. 시간이 지나면 수료시키겠지.'라는 판단은 심각한 착각이었다. 월요일에 입소해 12개 과정을 수료하면 되지만, 퇴소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토요일 오전부터 그다음 주 수요일까지 이어진다. 단 1분도 머무르기 싫은 곳에서 며칠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친다. 쉬운 과정은 있을 리 없다. 굳이 일례로 랜턴과 지도 한 장 주고 각기 다른 코스를 혼자 통과하는 40km 야간 행군이 있다.
살천스러운 교관은 심리전에도 매우 능했다. 교육생에게 희망을 줬다 연속으로 절망하게 만들어 독이 바짝 오르게 만들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며 정말 최선을 다하는가를 면밀히 체크했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았다. 어머니는 생전에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하셨지만 나를 이곳에 추천한 사람도 미웠고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약자의 마지막 권리인 사직서를 써야 할 운명이었다. 한 잔의 물을 들이켜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하자, 세 살배기 아이와 아내 얼굴이 어른거렸다. 혼자가 아니었다. 다시 이를 악물었다.
보란 듯 내보이고 싶어 5박 6일간 4시간 눈을 붙이며 성대결절로 몇 번의 피를 토한 결과 상위 5% 내로 합격했다. 피땀으로 얼룩진 수료증을 받아 드니 절로 통곡이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동기 연수생의 부축을 받고 일어선 하얀 벽에 걸린 거울에는 엿새 동안 씻지도 못한 텁수룩한 수염에 두 눈이 푹 꺼진 초췌한 몰골의 이방인이 있었다. 그게 나였다. 인생의 바닥에서 눈앞에 어른거리던 죽음을 보고서야 내가 보였다.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토록 내가 내뱉었던 모든 원망의 본질이 남과 조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른 직원보다 먼저 훈련을 보낸 이유인즉 업무 능력은 탁월하지만, 툭하면 바른말을 하고 온통 불만투성이인 동료들의 가려운 등까지 긁어줘 놔두면 화근이 될 거라는 보고가 발단이었다.
예전의 나를 당장 죽여야 했다. 불만이 많은 동료와는 적정거리를 두었고 불만을 품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일절 관심을 뚝 끊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변하냐는 비아냥거림도 흘러 넘기며, 본 업무에만 몰입하자 오래되지 않아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던 실세 임원의 두터운 신임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을까? 지옥훈련으로는 다져진 각오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나를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하나를 내 안에 들여놓았다. 반원형의 손잡이가 달린 질박한 구리거울이다. 며칠만 닦지 않으면 녹슬어 보이지 않는 구리거울을 매일 닦는 것은 나를 들여다보는 성찰이고 정화이며 재충전인 셈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명상을 통한 자아성찰은 온전히 나를 위한 행위이며 말끔하게 닦여진 거울을 통해 선명하게 보고자 하는 건 자아自我였다.
칠漆 / 변 종 호
얼마나 많은 혼이 깃들었기에 이천 년을 넘어섰을까. 누군가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옻나무, 수많은 고통과 시행착오를 견디며 나무의 영혼을 담아 인간의 손길로 다시 태어난 칠漆이다.
마음의 고향이라서일까. 전통을 이어가는 유튜브 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색채는 은은하나 가볍지 않고 광택은 있으나 눈부시지 않으며 화려하나 질리지 않는다. 옻의 매력에 푹 빠졌다.
채취 현장을 보러 충북 옥천을 찾았다. 피부에 닿으면 옻이 올라 눈만 빼고 가렸으니 오죽 더울까, 물에 빠졌다 나온 몰골의 40대 칼잡이는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다. 내뱉는 말은 가시 투성이고 눈총은 따가웠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찾아온 연유를 밝혔다. 그제야 생수로 목을 축이더니 잔뜩 세웠던 가시를 눕힌다.
야무지게 움켜잡은 칼이 옻나무 껍질에 V자로 홈을 내자 왈칵 피눈물을 쏟는다. 말간 첫 물에 이어 진득한 액이 흐른다.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전용 주걱으로 알뜰하게 긁어 담는다. 그래 봐야 칼집 하나에 고작 서너 방울이다. 속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가련하다. 십 년 가까이 몸집을 키워야 상흔을 훈장처럼 남길 수 있다. 칠은 종일 채취해야 200~300g을 얻을 수 있단다. 두어 시간 지켜봤지만, 전통을 이어간다는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채취는 유월부터 시월 말까지 하는데 육칠월 많은 비가 내린 후나 장마 뒤 채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초칠이란다. 팔구월에 나오는 칠은 성칠이며 시월에 채취하면 말칠이다. 한겨울 강물에 옻나무 도막을 세워 물 먹인 뒤 가열해 얻는 화칠은 식재료로 쓰인다.
아무리 귀한 생칠도 곧장 쓸 수는 없다. 두어 번 헝겊으로 이물질을 거르는 정제와 수분을 제거하는 교반을 거치면 색은 짙어지고 점성도 높아져 자연이 주는 최상의 도장재로 완성되는 셈이다.
우리가 옻을 사용한 시기는 신석기시대이며 접착제로 쓰였다고 한다. 살갗에 닿으면 독이 오르는 옻을 적소에 활용했던 선인先人의 지혜에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옻은 방습 방염 방충 부패방지 접착제로 쓰이며, 전통문화용품이나 소반 제기 반닫이와 오동나무 관에도 사용했다. 남원의 실상사 아미타불좌상은 목불木佛이지만 삼베에 옻을 칠하여 붙이고 건조 후 다시 칠하고 겹쳐 붙인 건칠불로 육백 년이 지났지만 잘 보존되고 있다.
고려 시대 제작된 보물 제1975호 나전경합을 현대감각으로 재현하는 영상을 봤다. 목장이 잣나무로 백골을 짜고 칠장이 삼베를 안팎으로 붙여 말리고 덧칠하는 반복 과정을 거쳐 나전장에게 넘기면 조개껍데기를 자르고 갈아 모란 넝쿨과 마엽무늬로 장식했다. 이어 황동으로 만든 경첩과 자물쇠, 양쪽에 손잡이를 붙이면 경합은 완성되었다. 안목이 없는 탓인지 진품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찬찬히 톺아보면 어느 누가 멋스러움에 반하지 않겠는가. 가로 42cm, 세로 20cm, 높이 23cm의 목침만 한 나전 경합을 네 명의 장인이 2년간 혼신의 노력으로 이뤄낸 명작이다. 어느 시대든 명품이나 명작의 칭호를 얻으려면 얼마나 고뇌에 찬 고통이 따라야 했을까.
다른 장인보다 칠장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손대현 장인은 정제와 교반으로 얻은 칠을 목재 함에 바르기 전에 몇 번이나 정성 들여 붓을 손질했다. 신에게 제를 올리듯 매우 신중한 손길로 한 겹씩 칠을 입히는 과정은 마치 진주조개가 자신의 몸에 들어온 핵에 수천 겹의 물질을 바르고 묻혀서 영롱한 보석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그의 간절한 염원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칠을 채취하던 사람과 칠을 정제하고 교반 하던 당신의 혼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무엇이든 저렇게 공들이면 안 될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옻나무를 가꾸고 칼로 그어 생칠을 얻음은 집필을 위해 끝없이 통찰하며 사유의 뜰을 넓혀가는 것이요, 칠을 정제 교반 하여 초칠과 마감으로 광택을 내는 일은 치열하게 쓴 작품을 한 자 한 자 조탁하여 완성하는 수십 번의 퇴고가 아니겠는가. 몇천 년을 넘어서 가없이 도전하는 칠을 보면서 지난날을 돌아본다. 읽고 나면 금방 잊히는 글이 아니라 독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몇 편의 작품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살아가는 지혜를 옻나무를 통해 한 수 배운다.
나무의 혼이 담긴 한 방울 칠漆의 가공할 내공은 영원을 향한 뚝심인 것을.
범벅 / 변 종 호
불현듯 그리웠다. 날리는 눈발 탓일지도 모른다. 누르고 살지만 가끔 훅하고 들이닥치는 게 그리움이다. 구실이야 입맛이 동해서라지만 속내가 다르다는 걸 40년 살붙이고 살아온 아내가 모를 리 없다. 그저 군소리 않고 따라나서는 게 고마울 뿐이다.
차림이라야 감자옹심이와 옹심이가 들어간 칼국수, 감자 부침개가 전부이다. 모두 감자가 흔한 고향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소박한 음식이다. 향토음식점 주인은 강원도 태생이거나 그곳에서 오래 살았을 게다. 예전에는 빈 좌석이 없더니 코로나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두 테이블에 두 명씩만 앉아있다. 온기가 있어야 할 실내 공기조차 써늘하다. 깡마른 데다 푸석한 파마머리의 표정 없는 주인 얼굴을 보니 정말 힘들구나 싶었다.
구수하고 진한 국물이 일품인 옹심이를 주문했더니 맛이나 보라며 작은 접시에 강냉이 범벅을 내놓았다. 이 얼마 만인가. 횡재한 기분이다. 적은 양이라 젓가락으로 몇 개 집어 눈을 감고 찬찬히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식감은 쫀득하고 맛은 달곰하다. 적당히 무른 밤콩과 찰기 있는 찰강냉이가 잘 어우러졌다. 뻐근해오는 목울대, 고개를 숙이면 곧바로 쏟아질 것 같아 뿌연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접시를 보니 아내는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는다.
걸쭉하면서도 들깨가 들어가 구수한 감자옹심이를 앞에 두고도 몇 개의 알갱이로 겨우 입맛만 다셨지만 맛을 또렷이 기억하는 가슴은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쫀득하고 달달해 구미가 당기던 어머니의 범벅 속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유년 시절, 워낙 나이 차가 많은 피붙이의 외면으로 어디든 어머니의 치맛자락만 붙잡고 따라다녔다. 오랫동안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모습을 봐서인지 웬만한 것은 곧잘 하는 터라 겨울이면 별미로 만들어주던 강냉이 범벅에 도전하기로 했다.
음식 재료는 강원도 고향에서 주문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재료라야 껍질을 벗긴 찰강냉이 알과 밤콩뿐이다. 강냉이 알은 삶으면 쉽게 말랑해졌지만 밤콩은 뜨거운 불 맛을 보면서도 단단한 몸뚱이를 쉬이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리 불렸어야 했다.
처음부터 큰 기대는 않았지만, 물이 졸아들면 붓고 또 붓고 서너 번을 더 부으며 만든 범벅은 실패작이었다. 때깔도 맛도 어머니 범벅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뭐든 눈으로 보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생각대로 안 되는 게 세상사가 아니던가. 모양이 그럴듯하면 짜거나 너무 달았고 간과 단맛을 맞추다 보면 강냉이 알이 다 풀어져 곤죽이 되었다. 세 번의 실패 끝에야 밤콩이 너무 무르지도 않고 강냉이 알이 말랑하면서도 쫀득하고 걸쭉한 농도의 색깔도 맛도 어머니의 범벅을 흉내 낼 수 있었다.
범벅을 쑤다 보니 어쩌면 부부의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깍지가 씌었으니 망정이지 살아보면 어디 좋기만 할까.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했기에 정작 자신은 모르거나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단점과 아집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모서리는 살면서 부닥치며 떨어져야 원만해지거늘 채 그런 과정도 견디지 못하고 등 돌리는 부부도 많지 않은가.
과연 나는 무엇이었을까, 돌아보니 영락없이 돌같이 딱딱한 밤콩이었다. 남보다 일찍 햇볕과 비바람을 견뎌내며 단단하게 공글러서일까, 쉽게 물러지지도 않고 자리도 내주지 않았으며 품는 노력조차 않았던 젊은 날의 나였다. 아내가 품으려 들면 간섭이고 집착이라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아둔하게도 피가 뜨겁던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반면, 꾀도 요령도 부리지 못하는 아내는 은행 직원, 어미, 아내라는 1인 3역을 하면서도 오직 가족을 위해 자신을 녹여가며 모질고 단단한 밤콩 같은 남편을 가슴으로 품었던 찰강냉이였다. “오래 묵고 많이 참는 단련 과정을 거쳐야 그윽한 사랑을 할 수 있다던가.”
뾰족한 모서리를 갈아내느라 아웅다웅하며 살아온 사십 년이 얼굴에 그냥 금만 긋고 떠나간 건 아니었다. 인생이란 큰 바다에 부부라는 배 띄워놓고 가야 한다면 서로 이해 못 할 것도 참지 못할 것도 없다는 걸 알게까지 이만큼 살아온 세월이 필요했다.
잘 쑤어진 범벅 같은 부부가 되려면 지녔던 아집, 고질병 같은 습관, 부질없는 욕심, 서 푼어치도 안 되는 자존심까지 내팽개칠 일이다. 게다가 나긋나긋한 심성을 위해 뜨거운 불 맛을 보며 푹 삶기는 단련을 통해 몸을 녹여 서로 품어 안으면 그만이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치를 다시 새긴다.
손에 대하여 / 변 종 호
악수하며 잡은 손이 허전했다. 표정을 읽은 그가 웃으며 말했다. “ 일하다 손가락 두 개를 잃었어요. 제 손을 잡은 사람은 다들 그러는 걸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손바닥이 감지했던 허전함은 이내 사십여 년을 거슬러 형님 농장에서 일하던 열아홉 처녀를 불러내었다. 부지런하고 예쁜 데다 상냥했다. 정도 많아 집에서 만든 음식을 가끔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그 처자가 마음에 든 어머니는 “영자가 둘째 셋째 손가락이 없어 그렇지 살림은 잘할 것 같은데, 한 번 만나 볼래.” 하셨다. 모래밭에 물이 스며들 듯 다른 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두 손가락이 없다는 말만 턱 하니 목에 걸렸다.
온갖 일을 하다 보니 수난을 당하는 것도 손이다. 관계의 시작도 손이 나서야 하고 이별의 아쉬움도 흔들며 달래야 한다. 몸이 잘못을 저지르면 우선 고개를 숙여야 하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무릎을 꿇고 손을 비벼야 한다. 이는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지만 신에게 올리는 간절한 비손이기도 했다.
빤히 보이는 손해도 피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메커트로닉스도 넘볼 수 없다. 눈과는 불공정한 종속관계다. 눈의 지시라면 궂은일도 제 몸 상하는 줄 모르고 따르다 상처를 훈장처럼 매달고 산다. 눈의 꼬드김에 수시로 뒤집는 마음 따라 더러는 보듬고 쓰다듬지만, 이내 밀어내고 뿌리치며 알게 모르게 슬쩍하는 버릇도 있다.
상전인 눈의 협조아래 정교한 손이 이룬 업적이 경이롭다. 로마 시스티나성당의 ‘천지창조’도 4년 동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을 채워나간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손이요,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모나리자’ 역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손에서 탄생하였다.
작은 신체 부위지만 몸 전체를 평가하는 바로미터 역시 손이다. 뭔가 일하고 만드는 솜씨를 손재주라 하고, 맨손으로 주물러 만든 맛있는 음식은 손맛이요, 일을 깔끔히 매듭지으면 손끝이 맵다고 하며, 그늘진 삶에서 벗어나면 손을 씻었음이요, 하던 일을 멈추거나 그만두면 손을 놓았다고 한다.
고양이 턱수염같이 예민한 손에는 실치잡이 그물코처럼 말초신경이 밀집해 있어 매우 민감하다. 숙달된 달인은 손끝으로 떼는 밀가루 반죽 무게나 초밥의 밥알조차 큰 오차 없이 계량할 정도다. 나 역시 정밀 산업기계를 만들던 시절에는 머리카락의 절반도 안 되는 부품의 두께 차이를 손으로 만져 구분할 정도였다.
몸의 축소판인 손에는 건강을 체크할 수 있는 손톱과 오장육부를 관장하는 혈 자리가 있다. 엄지는 간 검지는 심장 중지는 머리 약지는 폐 새끼손가락은 신장을 관장하고 손바닥 가운데는 위와 연관된 혈이 있어 해당 혈을 손가락으로 누르기만 해도 멀미나 소화불량 가벼운 두통은 완화시킬 수도 있다.
살아있는 권력이 사실과 비위를 멋대로 조작하고 은폐하듯, 삶의 흔적인 얼굴 주름을 성형수술로 왜곡시킬 수 있지만, 사관史官이 사실에 입각한 세세한 기록을 이조왕조실록李朝王朝實錄에 가감 없이 기록한 것처럼 손은 살아온 내력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손등에 상세히 그려놓는다. 그런 까닭에 굵어진 마디나 주름만 봐도 그 사람의 지나온 삶이 보인다.
저 혼자 휭하니 갈 거 같은 세월은 심술궂게도 인간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선을 그어놓고 떠난다. 하지만 젊어지고 싶은 욕구는 그 주름마저도 잡아당겨 젊게 만들지만 손등의 내력만큼은 현대 의술조차 손댈 수 없단다. 기만하지 말라는 엄중한 신의 명령이 아닌가.
두 손가락을 잃어 악수할 때 허전함과 민망함을 안겼던 그분은 영등포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며 회사에 부품을 공급했다. 심성이 고운 데다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사 긍정적이고 성실하여 점차 공장을 늘려갈 정도로 신뢰받는 사장이었다.
손을 가진 조건은 같다. 다만 통제가 어려운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손은 달라진다. 이순 중반의 나이테가 손등에 선명하게 나타나니 촘촘했던 마음이 헐거워진다. 이제는 뿌리치지 말고 잡아주는 따뜻한 손이 되어야겠다. 살아보니 움켜쥐려고 했던 세월은 고단하기만 했었는데 손을 조금 펴니 살만했다. 그렇게 잡으려 했던 물질의 풍요보다 소소함에서 얻는 행복이 소중함을 일러주는 건 수난으로 이골이 난 두 손인 것을.
선방의 죽비 소리 / 변 종 호
장마철에 맑은 날을 기대한 게 무리였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잘게 부수며 내달리는 차 안에서 몸도 마음도 흔들리고 있다. 꼭 가야만 하나 버리고 얻음은 무엇이며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찾을 수는 있을까.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신청했지만 두려움뿐이다.
'착'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 소리에 흔들리던 마음이 곧추선다.
목에 관한 고찰 / 변 종 호
목은 밥의 통로이다. 그런 목을 두고 생겨난 말이 있다. 목으로 밥알을 넘길 가족을 생각해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할 때는 포도청이요. 밥줄이 끊어지면 목이 잘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