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학 개론 / 김 길 영
바람학 개론 / 김 길 영
바람은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다. 가고 싶은 곳은 아무 데나 간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비껴가고 언덕진 곳에서는 뛰어넘는다. 바람은 정을 붙일 데가 마땅치 않아서인지 추억을 만들지 않는다. 추억이 없으므로 사진첩을 뒤적일 일도 없다. 어디론가 정처 없이 가야만 하는 인생론과도 흡사하다.
바람은 거리낌이 없는 존재다. 누구의 간섭도 싫어한다. 성인의 말씀을 정신적 지주로 삼지도 않는다. 태생의 역사를 모르는 바람은 일정한 행선지가 없어 기분 내키는 대로 산다. 그들 흐름의 행보는 밤낮이 없지만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간다는 믿음이 있다.
바람은 바람둥이다. 바람난 남정네처럼 아무하고나 몸을 섞는다. 몸과 몸을 섞는 데는 이골이 난 선수들이다. 통제받지 않는 망나니처럼 그렇게 또 몸을 자주 섞어도 주목할 만한 사고를 낸 적이 없다. 몸을 섞었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가정법원의 신세를 져본 적도 없다.
바람은 평생을 병적인 역마살로 산다. 역마살을 앓을 때처럼 정처 없이 쏘다닌다. 쏘다니다가 지치기라도 하면 없는 듯이 쉬었다가 다시 일어서서 길을 떠난다. 길을 걸을 때도 일정한 보폭을 싫어한다. 1분 동안 몇 걸음을 걷고, 보폭을 몇 센티로 하라는 걸음의 규정을 무시한다. 또 직각 보행을 배우지 못했다며 갈팡질팡 걷는 걸 보면 마치 자유분방한 외동아들 놈 투정 부리는 몸짓이다.
바람은 예민한 더듬이 촉을 가졌다. 더듬이 촉을 세우고 떼 지어 다니다가 누구의 멱살이라도 잡으면 깡패처럼 행패를 부린다. 그들은 꽃잎을 간질이는 작은 흔들림도 있지만, 산더미 같은 비구름을 몰고 와 산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하여, 피땀 흘려 가꾼 농경지를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바람은 실체와는 달리 위력을 과시할 때도 있다. 약한 것이 무섭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죽은 듯이 잠잠했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변덕스럽게 몸을 일으켜 길을 떠난다.
바람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닮은 얼굴이 없다. 같은 모양을 만들지 않는다. 색깔도 없는 것이 생김새도 가지가지다.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푼 몸통을 주삿바늘로 콕 찌르면 피-이 피-이 소리를 내며 죽는시늉을 한다. 잔뜩 부풀었던 몸체가 금세 쭈글쭈글해지기도 하고, 배불뚝이 복어처럼 순간순간 배를 불렸다 가라앉혔다 방정을 떤다.
바람은 요술쟁이다. 몸을 가장 작게 부수어 물방울 속에 웅크릴 줄도 안다. 또 강물을 털고 올라온 물방울을 쓸어 모아 새벽 물안개를 만들기도 한다. 그 물안개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공중에다 한바탕 일필휘지로 그어대는 모습은 좀체 보기 드문 풍경이다. 그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면 신비감마저 느낀다.
바람의 말랑말랑한 살결에는 서릿발 같은 가시가 꽂혀있다. 슬쩍 대이기만 해도 상처가 난다. 날 선 바람은 칼날보다 무섭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한겨울 이슥한 밤, 담을 타 넘고 들어와 잠 못 이루는 창문에 대고 쇳소리 휘파람을 불어대는 걸 보면 정이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어 보인다. 그래도 흔적을 남기려고 아무 데나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
바람은 사람의 허파 속에까지 파고들어 병을 만들기도 하고 병을 낫게도 한다. 때로는 비 맞은 어깨를 용케도 찾아내어 몸살 앓는 삭신을 쑤셔대다가 뼈 속에 구멍을 송송 내기도 하면서 마치 저들이 조물주인 양 만물을 손아귀에 쥐고 저들 마음대로 행동하려 든다.
바람은 변덕쟁이다. 어떤 때는 여래처럼 열반에 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수처럼 부활도 한다. 일상의 흐름 속에서 하루해가 지루하고 따분하다 싶으면 짱짱한 바다를 주름잡았다 펴기도 하고, 멀쩡한 하늘을 들어 올렸다 끌어내렸다 야단법석을 떤다.
늘그막 인생들의 주변을 맴돌던 바람은 하릴없이 빈둥빈둥 놀면 뭐하냐고 글이나 써보라고 허파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는다. 어떤 이는 바람의 꼬임에 빠져 수필도 쓰고 시도 쓴다. 오지랖 넓은 바람은 하는 일도 많다.
단단함 그리고 시나브로 / 김 길 영
단단하기로 말하면 대리석만 한 게 또 없을 것이다. 대리석은 땅 속에 묻혀 있던 석회암이 높은 온도와 강한 압력에 의해 약한 지층을 뚫고 나와 굳어진 변성암의 일종이다.
‘대리석’이라는 명칭은 중국 ‘대리’지역에서 생산된 암석에서 연유된다. 설마 고열에 녹은 석회성분이 굳어져 대리석이 되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렇다면 다비식을 마친 스님의 사리도 긴 시간 시나브로 굳어지면 대리석처럼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다.
지구의 겉을 구성하는 암석권이 약 100km쯤 된다고 한다. 그 판이 연약권 층과 맞물려 움직이며 상대 운동 방향과 속도에 따라 물리적 혹은 화학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운동으로 인해 지구 내에 맨틀이 움직이면서 지표면의 생물체들이 땅속으로 묻히기도 하고땅 속의 뜨거운 물체가 솟아나 새로운 형태의 지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리석의 단단함도 긴 시간의 흐름이 움켜쥐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움켜쥔 흐름이 한순간이라도 놓아버렸더라면 대리석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흐름이 움켜쥐고 있던 현상을 ‘흐름의 악력握力’이라 이름 붙인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45억 6천만년이라 산출해 냈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백 년으로 볼 때, 지구의 나이는 무한의 흐름이나 다름이 없다. 무한의 흐름 속에서 모든 물체가 생성하고 소멸해 왔다. 지구가 생성되기 이전에도 우주에는 측정할 수 없는 억겁의 흐름이 지속되고 있었다. 23.5도 기울기로 자전과 공전하는 지구를 계절로 나누고 시간으로 쪼개고 또 분초로 세분화한 것은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정해진 것들이다.
‘질 들뢰즈’는 『생성존재론』에서 ‘시간이란 흐름 속에 새로운 것이 무수히 나타나며 예단할 수 없는 비결정성이 깃드는 존재’라고 했다. 지금도 무한의 흐름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지구가 소멸되지 않는 한 이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정 기간 흐름이 움켜쥐었던 대리석도 시나브로 분해될 것이 분명하다. 단단한 대리석도 다른 물체에 비해 시나브로 분해되겠지만 변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내 생을 뒤돌아본다. 나에게 필요했던 의식주도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음식의 가짓수는 말할 수 없고, 맛의 변천사 또한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다. 나의 육신과 영혼도 팔십 년이란 흐름 속에서 조금씩 지속 성장해 왔고 늙어 가는 중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어 가는 삶에서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변해가고 있다.
내가 형체를 갖추고 살아있는 것도 무한의 흐름이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흐름이란 나의 존재를 의미하며 그 흐름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형체를갖춘 형상들도 흐름이 쥐고 있던 힘을 빼버리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형체를 잃어버릴 게 빤하다.
결국 내 육신도 내 나이만큼 긴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 흐름이 나를 붙잡아주고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중에도 단명한 사람과 오래 산 사람과 차이가 있다면 주변의 현상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느꼈느냐 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무한의 흐름 속에 오래 머물고 싶다. 언제 소멸될지 모르는 생명인데도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나 느낌이 문자화 되기 이전의 정황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 감정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유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