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송 작품론 / 권 대 근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심미적 취향, 절경의 미학 ― 정여송의 수필을 중심으로
I. 열며
정여송 수필에 대한 이 평설은 수필이란 문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어야 한다는 전제로 출발한다. 문학적 접근, 즉 수필이 일상의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문학적 장치를 예술적 장치로 승화시켜 나가는 노력하에서 집필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다. 수필의 예술적 접근만이 수필의 잡문성을 해소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폄하되어 온 수필의 위상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정여송 수필은 적격이다. 그래서일까. 여러 평론가들이 앞 다투어 그녀의 작품에 꽃을 얹었다. 경이와 찬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정여송의 수필은 누구나 쓰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써지는 글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인식이 세상의 저변에 깔리지 않는 한, 수필의 운명은 서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정여송 본격수필이 갖는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평자는 오래 전부터 이제 수필 쓰기의 출발점은 문학적인 취미에서가 아니라 심미적 취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적어도 감성과 지성의 균형 있는 조화를 통해 사물과 사회 현상의 실재와 작가 스스로의 인생관을 동시에 노출한 작품이 나와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심미적 의무와 무엇이 아름다움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아는 미적 취향을 가진 수필가가 붓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필이 문학 단계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상위 개념으로 나아간 예술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라는 식으로 진술되어야 옳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이런 질문에 답을 주는 정여송의 수필을 감상해 보자.
II. 심미적 취향과 절경의 미학
정여송은 부산 출신으로 1995년 격월간 『수필과 비평』지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필마의 기운을 머금고 오직 본격수필만을 위해 실험 정신과 낯설게 하기 수법 등의 작가 정신과 창작 기법의 연마를 통해 좋은 수필을 써 왔고, 여러 수필평론가들로부터 대단한 수필가라는 호평을 받아 온 작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수필을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새로운 수필 쓰기를 통해 이제 그 내용부터 작법까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상식과 편견, 그리고 평범을 온몸으로 거부하면서 세상의 모든 익숙한 것을 새로 보기, 다시 보기, 낯설게 보기 등을 통해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고 있다. 적어도 그녀는 수필을 통해 수필은 문학이요,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수필을 읽고 나면,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예술성이 없으면 문학이 아니요, 문학성이 없으면 유명한 수필가가 쓴 글이라 해도 수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필의 형식을 갖춘 글 가운데 예술성, 즉 문학성이 제고된 수필다운 수필만을 수필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수필의 문학성이란, 한 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만들어 가는 구조적인,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가 세련되게 문학적 방식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강렬한 제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 그녀의 실험적 수필, 「천자문」은 삼단 구성으로 초장이 두 단락 333자, 중장이 두 단락 333자, 종장이 두 단락 334자, 도합 1,000자로 된 수필이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로 된 천자문을 한글 천자로 새롭게 형상화한 것이다. 이 수필은 발견의 전형이다. 「세상 나누기」란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이자 성어가 60개, 삼자 성어가 32개, 사자성어가 32개, 그리고 오자 성어가 15개로 구성되어 있다. 두 자가 하나의 단어가 되어 세상의 이치를 이루는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세 자, 네 자, 다섯 자로 확대하면서 상극의 반의적 어의를 상생의 가치로 끌어올리는 그녀의 이원적 세상에 대한 인식은 상식을 훌쩍 넘어선다. 치밀한 전략적 글쓰기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창조적 사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적 사유와 관조 미학이 빛나는 「목변석」은 세련된 응시의 결과물이다. 「마중물」은 형이하학적 제재로부터 형이상학적 인생의 원리를 구축한 수작이다. 「트랜스젠더」 역시 참신한 관조가 빛나는 상상력의 보고요, 절경이 놓아진 그림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문학으로서 수필이요, 예술로서 수필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들이 살고 있는 집을 짓는 일이듯이, 수필가는 마음의 풍경을 넘어서서 독자에게 절경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 절경이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풍경을 낯설게 느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1. 인상과 절경
본래 수필은 작가 자신의 자기탐색 혹은 자기성찰의 성격이 짙은 산문문학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수필가는 자신의 주변에서 친숙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 삶에 자신의 언어적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그만큼 독자가 수필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해석하는 데 드는 품은 타 장르에 비해 그리 크지 않게 되고,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수필은 이해와 해석이 용이한 언어적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수필적 특성과 한계 때문에 수필은 예술의 문턱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잡문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정여송은 이런 수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넘어서서 예술로서의 수필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려면 재료의 차원을 넘어 디자인에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논어』에서도 문질빈빈이라 하여 표현을 중시하였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서술성이나 마음의 풍경에 중점을 두는 서정성에 더하여 미학성을 추구하여야 하는 일은 본격수필 창작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언뜻 그녀의 수필이 생경하거나 생소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예술수필은 본질적으로 인상적인 모습과 절경을 추구하므로 그런 낯선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전략적으로 글을 쓰려는 노력은 바로 본격수필가가 가져야 할 자세다. 정여송의 수필을 읽으니, 문득 칸트가 말한 심미적 취향이란 말이 생각난다. 그녀는 일상적인 것을 인상적으로 포착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컬러로 칠하는 데 재주가 뛰어나다.
예술수필은 경계를 넘어서는 데서 생성된다. 그 경계는 바로 일상성이다. 일상성에서의 이탈에서, 예술은 싹을 틔우는 것이다. 누구나 겪는, 누구나 아는, 누구나 보는 일상적인 풍경이 아니라 일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다가오는 인상적인 절경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절경을 독자에게 느끼게 해야 한다. 천 개의 글자를 모으고, 자판을 두들기고, 문을 세운다로 요약되는 「천자문은 열 손가락으로 자판 전부를 다루니 세상이 손안에 있지 않는가.라는 문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천자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 천 자의 글자를 이용해 아무도 설계해 내지 못할 언어의 집을 짓고, 문패까지 단 그녀는 참으로 짓기 어려운 집을 지은 것이다. 이것이 절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천자문」과 「세상 나누기」는 이런 경계를 넘어선, 일상에서 끊어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현실이나 상황 앞에 선 심미적 취향을 가진 수필가 정여송의 수필 정신과 문학 정신을 그대로 보여 주는 수작으로 그녀의 세계관과 문학관이 집약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이미 여러 평론가들이 심도 있게 다뤘던 관계로 아쉽지만 그 가치와 의의 정도만 언급해 두고자 한다.
「세상 나누기」 역시 언어의 건축가 정여송이 글자 하나하나가 모여 둘을 이루고, 셋, 넷, 그리고 다섯을 이루어 각각이 표방하는 가치를 윷놀이에 빗대어 풀어내고, 이를 주제 의식으로 구체화한 작품이다. 언어를 부리는 솜씨가 그녀의 인식 능력이 비범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얼마든지 나누고 자르고 쪼개어 보라. 아무리 가른다 해도 세상은 언제나 하나일 뿐이다.라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친다.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목적지는 더불어와 함께라는 가치 창출이다. 그녀는 세상 나누기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평범을 넘어 다름을 지향한다. 일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different에서 아름다움을 얻게 되며, simple이나 easy에서 오는 미가 아니라 difficult하고, complicated한 데서 미학이 싹을 피운다는 것을 정여송은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이를 「세상 나누기」란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는 데서 누구보다도 프런티어적인 수필가다. 익숙한 일상이 아닌 낯선 인식에서 풍경은 절경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절경을 보는 눈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이런 글이 어찌 하루아침에 쉽게 창작되었을 리가 없다. 목적성과 선택성, 그리고 적절성에 기대어 그녀는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고 한 편의 수필을 빚기 위해 절차탁마했으리라 본다. 본격수필의 고지를 향해 필마의 기운으로 달려갔으리라. 수필의 정체성,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와 같은 실험 정신은 참신성의 확보 측면에서,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2. 체험과 묘사
공감이 가지 않는 인식 능력만으로 장면에서 장면으로, 정경에서 정경으로 옮아간다면, 아마 독자는 싫증이 나서 지쳐 버릴 것이다. 이 말은 수필의 내용을 이루는 글감이 적어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나 감동은 수필의 육체요, 미는 그 혼이기 때문에 수필은 가치 있는 체험이 내용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나 하는 경험은 사실 개념 차원에서 수필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가치 개념의 차원에서 본격수필의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성은 평범함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독자가 알고 있는, 독자가 살아가면서 느껴 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감동을 엮어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술로서의 수필은 감동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 감동은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에서 나온다. 경험을 넘어선 체험은 생경함과 신선함을 주면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정여송의 세 번째 수필 「마중물」은 바로 경험을 넘어서는 체험의 세계를 보여 주는 본격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인법적인 기술을 통해 수필 소재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이 수필은, 일찍이 수필의 아버지로 불렸던 피천득 선생이 강조한 대우성의 특성을 강하게 지닌 작품이다. 우선 수필적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부터 신선하다. 차가운 쇳덩어리에 생기와 온기를 불어넣어 생명의 옷을 입히는 작가의 휴머니즘적 시도도 훌륭하지만, 추억의 유년 시절을 여유 있게 더듬어 가는 모습이 이미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보인다. 절제된 감정으로 그리고 사물을 보는 따스한 눈빛으로 사십 년 만에 만나는 펌프 우물에 대한 의미 부여와 가치 발견은 그녀의 범상치 않은 인식 능력에 힘입어 강한 감동을 부여한다. 마ㆍ중ㆍ물, 마중물, 마중물 하고, 자꾸 불러 보게 됨의 원인을 마중 나가는 그리운 추억과 결부시켜 풀어낸 것은 주제 구체화의 한 방법으로 훌륭했다. 꽃망울이 달마중하느라 벙글어지며 내는 톡, 톡톡, 톡톡, 톡, 펌프 우물의 팔을 잡고 오르락내리락 힘질을 할 때 쏟아내던 호탕한 웃음소리, 콸콸콸콸 등의 어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독자의 시청각을 자극한 점도 정서 환기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의성어의 활용이 정여송의 수필에서는 수필의 격을 떨어트리기는커녕 실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런 감각화되고 구체화된 언어들이 춤을 추며 벌이는 인식의 축제는 사오십 대를 넘긴 중년을 유년의 시절로 데려간다. 환기적 요소가 강한 구어체의 활용과 수필의 대우성적 특성을 힘껏 발휘하는 그녀의 문체는 물의 유연한 상징과 함께 생명적인 심상을 가져와 이 작품의 가치를 드높인다 하겠다.
이 수필의 백미는 과거 회상에서 시점이 현재로 유턴되면서 시작되는 주제의식의 의미화 작업에 있다. 작가는 제재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 체험을 실생활 속에 용해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 수도족, 펌프족, 우물족 등의 비유를 통해 삶의 유형을 범주화하고, 이를 주제 의식에 활용하는 수법은 인식 구조로써 수필이 가지는 특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객관적 상관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이어 정서 이입, 그리고 의미화 수순을 밟는 창작 과정에 있어서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그저 한 바가지의 물인데, 그것이 무엇이기에 몸속으로 들어가 고인 물을 흔들고 깨워서 세상 밖으로 솟구치게 하는가. 하는 작가의 물음표는 삶의 활력소란 답을 이끌어 내고, 작가는 수필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 즉 독자와 함께 공감대에 서기 위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하여 대상으로부터 이탈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려, 그녀는 함축된 주제 의식을 구체화한다. 결말부로 진입하면서 작가는 함께 있어도 저마다 고독한 세상이라네. 그래서 마중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립다네. 하고 작가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풍경을 독자들이 그려 보게 만든다. 나아가서 인간의 삶과 주제 정신을 조우하게 한다. 이것이 수필이 갖는 힘이다. 수필의 성공 여부는 독자의 마음을 상상과 연상을 통해 움직이도록 하는 데에 있다고 할 때, 정여송의 이 수필은 미적 구조와 인식 구조 면에서 조율이 잘된 성공적인 작품이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나는 누구의 마중물이 될꼬!는 주제 의식을 음미하게 하는 의미화 작업이면서 동시에 여운적인 마무리다. 자기화를 통해 주제 의식을 상상화하는 수법도 일품이다.
수필이 아무리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라 하더라도 사실의 기록만으로는 수필이 되지 않는다. 사실을 넘어서는 변형과 보수가 있어야 문학이 되는 것이다. 조형성, 함축성, 탄력성이 통일성을 기반으로 문장 속에서 구축되어야 한다. 감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은 깊은 의미에서 문학은 아니다. 그것은 풍경의 재생이다. 있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일은 아니다. 수필은 fact가 아니라 reality를 추구하는 글이다. 「트랜스젠더」는 밤느정이를 제재로 해서 트랜스젠더의 은밀한 내면을 해부한 작품이다. 작가는 밤나무에서 나는 짙은 향내를 통해 자연의, 자연에 의한 성전환 수술을 연상한다. 미학적 관조에서 벗어난 생물학적인 이해를 통해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트랜스젠더의 고뇌와 아픔을 읽어낸 이 수필 또한 감동을 준다. 감성과 지성이 조화된 세련된 묘사가,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이 수필은 녹차의 다도와 같다. 생잎을 따 아무리 달여도 차의 색, 향, 미는 음미할 수 없다. 붓 가는 대로 써 대는 글이 수필이라면 누군들 못 쓰겠는가. 찻잎을 채취하여 덖거나 볶고 펄펄 끓는 물을 식혀 가면서 관조와 여유로 달여낼 때, 두 번 세 번 우려내도 그 색향미가 남아 있는 것이다. 남자의 그 냄새와 흡사한 꽃 비린내를 맡으며, 작가는 그 속에서 외톨이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발견하려고 얼마나 애썼겠는가. 수필은 이렇듯 치열한 관조와 탁월한 상상력이 묘사된 체험의 문장인 것이다.
이 작품의 정점에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견뎌야 한다는 작가의 인생 철학이 녹아 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밤낮으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밤나무의 성전환 시술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녀가 얼마나 대상을 치열하게 관조하며, 수필에서 부족한 상상력의 보완을 위해 힘쓰는지를 알 수 있다. 시술의 고통을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 밤의 울음과 밤꽃의 냄새가 씨줄과 날줄로 교차되면서 트랜스젠더를 떠올리게 된다. 남성적 밤느정이가 하염없이 지고 또 지면서 포침을 박은 각두로 성을 쌓고, 단단한 갈색 껍데기로 담을 치며, 얇은 속껍질로 챙챙 울을 여미는, 여성적 변신에의 혼혈을 기울이는 그런 기다림의 인고 끝에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밤송이가 탄생된다고 적고 있다. 그 인고의 과정을 밤송이가 내기에 생을 바친다고 묘사하는 부분에는 생명 외경 정신이 녹아 있다. 딱딱한 밤송이가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말하려는 고백이라는 것을 알아낸 사실은 이 작품의 쾌미다. 그것을 작가는 차마 몰랐고, 치열한 관조를 통해 그 의미를 캐내었으니, 이런 훌륭한 수필이 탄생된 것이다.
결말 단락은 찢어진 각두를 반쯤 걸치고 드러낸 알밤의 묘사로 짜여졌다. 주제 의식이 상상화된 부분이다. 절세가인의 여인, 트랜스젠더의 이미지가 오버랩 된다. 타고난 미인보다 고통을 이기고 여자가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견뎌내기를 통해 탄생된 트랜스젠더에게 보내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에서, 그리고 작가는 견뎌내기를 통해 탄생된 밤의 묘사를 통해 인생은 견디는 것이란 교훈을 담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담한 접근이며, 용기 있는 관찰이고, 참신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밤이 익어 가는 과정을 트랜스젠더화에 결부시킨 상상력 그리고 섬세하고 세련된 묘사는 그녀의 수필을 본격화하는 데 기여한다.
Ⅲ. 닫으며
수필가가 쓴 글이라고 해서 모두 수필이 될 수 없다. 수필에 예술성이 있어야만 자신의 글이 평론가에 의해 더 높이 평가될 수 있다. 내 인생을 내가 그린다고 모두 수필이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수필의 개념을 알고, 문학을 알고, 예술을 아는 사람만이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고, 적어도 예술적 차원으로 수필미학을 끌어올릴 수 있다. 정여송이 그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필 창작에서 통섭이 요구되는 시대이니만큼, 수필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는 데 대해 정여송은 답을 주는 작가다. 어찌 여기에 대한 답뿐이겠는가. 정여송은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수필가는 고뇌해야 한다는 점을 창작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유와 언어의 조탁이 따르는 예술성은 대상과의 처절한 투쟁이나 자신과의 혹독한 싸움에서 얻어진다는 것 또한 그녀는 이들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정여송의 수필처럼 수필문학의 심미적 기능을 제고할 때만이 수필문학의 본령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상상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수필을 쓴다고 하더라도 정여송의 수필처럼 치열한 관조가 배어야 문학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국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나름대로 수필에 대한 예술성의 개념을 정립하고 실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수필을 끊임없이 예술로 끌어올리려 노력해야 한다. 수필의 개념이 이런 식으로 예술의 바운드리 안에서 엄격히 제한될 때, 비로소 수필의 가치와 격이 높아진다는 것을 정여송이 보여 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한국 수필을 위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누군가 정여송의 수필을 만나면서 희망의 등 하나를 다시 내어 건다고 했다. 위대한 작가다. 예술성이 충분히 제고되어 있는 정여송의 수필이야말로 진정한 본격수필이 아니겠는가. 한국 수필의 미래를 그녀에게 걸어 본다.
│문학적 자전│
노동, 그리고 놀이
열흘 후면 아랫집이 이사를 간다. 문 하나 열면 만날 수 있는 지척이 원로(遠路)가 될 터이니 한 달에 한 번이나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 한 잔 마시자며 부른다. 바람도 쐬잔다. 나서려는데 자동차 키를 찾는다. 늘 놓았던 자리에 없는가 보다.
가방을 뒤진다. 부엌 싱크대 위, 서랍을 들춘다. 화장대 심지어 화장실까지 놓아둘 만한 곳을 더툰다. 머릿속에 담아 둔 녹음 짙은 나무와 그 사이로 난 시원한 길, 상쾌한 바람과 마음을 씻어 줄 풍경이 그만 민들레 홀씨가 된다. 작디작은 열쇠 하나가 온 머릿속을 다 점령한다. 친구는 기억 회로를 열고 어제 일들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결국 입고 나갔던 바지 주머니에서 찾아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 글쓰기와 무작위로 닮았다.
정신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찾으면 없어진 물건들. 아무리 챙겨도 내 품에서 떠나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언제나 가방 속에 있으려니 했던 볼펜, 어느 장소에선가 공손히 빠뜨리고 온 우산, 실밥이 풀려 아무도 모르게 떨어져 나간 단추, 셔츠를 벗을 때 소맷자락에 말려 나가 행방불명된 묵주 팔찌, 살결처럼 숨 쉬며 눈길과 목소리와 체온을 나누던 것들을 너무나 쉽게 잃어버린다.
한동안 나를 잃어버리고 산 적이 있다. 여느 아낙과 마찬가지로 내 안에도 부모와 남편과 아이들만 있었다. 아이들이 성큼 자라 내 손의 필요성이 덜어졌을 때 문득 바람 부는 광야 같은 허허로움에 시달렸다. 두려움마저 동반한 허전함은 나의 모든 것을 결박해 버렸다.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무저갱 같은, 홀로 표류된 듯한 나머지 함께라는 개념조차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꿈을 키워야 했다. 꿈이 크면 클수록 그림자도 짙다고들 하지만 숨바꼭질하는 재미로 촛불을 들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오래 전에 했던 것처럼 책을 읽어 댔고, 늦은 공부에 열중했다. 한 땀 한 땀 시간을 꿰맨 것이다. 세월을 적잖이 걸어왔으니 촛불 하나로 추위와 어둠이 걷히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녀린 촛불은 작은 대로 밝고, 작은 대로 따스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짝거리는 자신을 방치한 채 모르고 살아가는가. 아깝기가 그지없는 일이다. 잘나지 못했지만 나는 찾고 싶었다. 또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휘영함을 달래고 메우기 위해서다.
늦춤 없이 나를 발견하는 일에 전념했다. 매진하다 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나오는 의외성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나는 고여 있지 않고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른다. 순한 듯한데 당돌한 데가 있는 것 같고, 나약하지만 꼿꼿한 구석도 있다. 소극적 방위로 대처하면서도 발발(勃勃)한 의기를 뿜어내기도 한다. 스스로 만족스럽다가도 밉고 싫을 때가 한두 번인가. 참으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때가 허다하다.
어떤 때는 집념과 용기, 소신과 적극성, 당당함과 대범함 등으로 뻔뻔하였다. 혹여는 내 감각에 어긋나거나 불필요하게 느껴진 것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치기도 부렸다. 우스꽝스럽게도 자기를 절대시하는 자기도취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 구각(舊殼)을 벗으려 정진했다. 치열함으로 거듭나려고 애를 썼다. 순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당차게 요체도 잡아내었다. 그러다 보니 언뜻언뜻 운기 생동하는 자아를 만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휘영함을 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정체성과 내면의 힘을 실은 사고의 깊이를 재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도대체 먼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정신을 찾겠다고 건 모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었든 고이 잠들어 있는 잠재력을 발굴하는 것, 자아를 재발견하는 일. 그것은 순간의 경이감에 젖어 보려는 열정 어린 놀이였다. 겁나게 흥미로운 놀이였다.
하지만 그 놀이의 시작은 언제나 노동이었다. 때로는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면서 매운 연기에 목은 경련이 일어나 쿨룩거리고, 충혈된 눈은 눈물 범벅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과정을 언제고 거쳐야 했다. 더러는 면벽하고 있는 달마대사 앞에서 먹히지도 않는 거래를 제안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되었다. 형형한 눈빛으로 꿰뚫어 보고, 힘 있는 음성으로 말을 걸며, 꼿꼿한 자세로 기세를 펼쳤다. 천수관음보살 같은 손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되살려 내는 데 기력을 쏟았다. 순전히 노동이었다. 그쯤에 이르러서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장작더미를 태우게 되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 하는 즐거운 놀이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내는 일, 숨어 있는 나를 이끌어내는 일, 보이지 않는 나를 그려내는 일. 그것은 참말로 힘든 노동인 동시에 신나는 놀이다. 나아가서는 내 문학의 발판인 동시에 삶의 여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여송 / 충북 영동 출생ㆍ부경대학교 대학원(문학석사)ㆍ1995년 수필과 비평 등단ㆍ2005년 무원문학상, 2006년 신곡문학상 본상ㆍ한국문협, 부산문협,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현대수필문학회, 수필문학진흥회 회원ㆍ작품집 『힘쓰는 여자』, 『마중물』
대표 작품 / 千字文 외 4편
千 개의 글자를 갈고랑이로 긁어모은다. 구백구십구 개도 안 되고 한 개가 덤으로 얹혀도 싫다. 반드시 千 개라야 한다. 그것을 메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나선다. 매의 눈초리가 닿지 않고 야수의 왕자도 밟지 못한 길. 거닐면서 남다른 생각을 건져 올리고 낯선 언어를 찾아내어 새로운 文型을 그린다. 야무지고 익살스러우면 더없이 좋겠지.
한석봉 필 천자문. 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言才乎也로 끝나는 그 속에는 세상의 온갖 것이 들어 있다. 해와 달과 별의 이야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규칙, 책임과 의무 등.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득 차서 넘친다. 자연현상과 인간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질서와 체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내가 쓰려는 천자문은 그런 대단한 글이 못된다. 천자문에 감히 견줄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질이요, 소꿉놀이다. 하지만 쌓아 올린다. 정자든 초가든 슬래브든 빌딩이든 글자로 집을 짓는다.
字판을 두들긴다. 상상의 줄이 끊기니 손가락도 따라 쉰다. 아무리 타자치는 속도가 빠르다 해도 생각이 앞서지 않으면 허사다. 이야기 길을 뚫으려 자판을 들여다본다.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세상이 천자문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자판 위에도 있지 않은가.
있다, 있어. 모든 것이 있다. 육친과 내 곁에 머물던 사람들의 정이 있고, 어릴 적의 봉이와 경옥이와 명자가 있다. 천사의 아름다운 노래와 악마의 화려한 춤이 있다. 꽃, 바람, 구름, 기쁨, 슬픔으로 돌고 도는 계절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고, 마음속 깊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유행가 가사도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고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면 도로 ?님?이 되는 인생사라나. 웃음과 울음이 있다. 육체를 치유하는 힘도,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 희망의 길을 가리키는 금빛 이정표가 있다. 온갖 삶의 근본이 쫙 널려 있다. 백여섯 개 자판에 또 하나의 우주가 있다, 있어.
文을 세운다. 건축가가 되어 집을 짓는다. 닮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겉모양만 다르게 줄지어 선 카페들은 질색이다. 볼품은 없지만 들어서면 편안해지는 집. 누구든 눈길을 주지 않아도 참멋을 아는 사람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집. 외형보다 내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조심스럽게 말을 걸 듯 겸손하게 다가오는 마음들이 살고 있는 집. 그런 글집을 짓는다. 그곳에서 사람을 읽고 자연을 느끼고 세상을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보수가 있다면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 등의 평가가 아니다. 언어를 다듬어서 집을 짓는 즐거움이고, 마음속에 진득하게 똬리를 튼 생각의 짐을 벗어 버리는 해방감이다.
무엇이 부러우리. 무엇이 두려우리. 열 손가락으로 자판 전부를 다루니 세상이 손안에 있지 않은가. 정녕 엽기다. 가로 열쇠와 세로 열쇠를 풀어 가며 퍼즐 게임 하듯 열 손가락은 신이 나서 뚝딱 뚝딱 文을 세운다. 千字文이란 현판을 내어 건다.
세상 나누기 / 정 여 송
대박 터졌다!
커다랗게 부푼 흥부네 박 하나가 두 동강이로 갈라져 나둥그러진다.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다. 박을 켜던 사람들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두 쪽?이란 생각에 잡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떤 상품 광고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어디를 배경으로 잡을까. 어떻게 스케치를 할까. 무슨 색상을 입힐까. 몇 달 며칠을 생각에 잡혀 끌려 다닌다. ?하나인 세상을 명징하게 나눠 봐?? 짓궂은 착상에 갑자기 닻을 내린다. 옳거니! 불끈 쥔 주먹이 허공에 대고 힘을 찍는다. 기를 모은다. 포개 놓은 기왓장을 깨듯 손날을 세운다. 내리친다. 강 얼음이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
음양(陰陽), 선악(善惡), 명암(明暗), 흑백(黑白), 진퇴(進退), 천지(天地), 미추(美醜),
진위(眞僞), 주야(晝夜), 종횡(縱橫), 강산(江山), 이해(利害), 냉온(冷溫), 내외(內外),
시종(始終), 빈부(貧富), 왕래(往來), 고저(高低), 장단(長短), 상하(上下), 경중(輕重),
전후(前後), 좌우(左右), 유무(有無), 강약(强弱), 요철(凹凸), 피아(彼我), 건습(乾濕),
출몰(出沒), 공사(公私), 허실(虛實), 자타(自他), 신구(新舊), 이합(離合), 좌립(坐立),
상벌(賞罰), 출입(出入), 손익(損益), 득실(得失), 수지(收支), 다소(多少), 원근(遠近),
이동(異同), 개폐(開閉), 시비(是非), 단복(單複), 발착(發着), 귀천(貴賤), 생숙(生熟),
진가(眞假), 청탁(淸濁), 완급(緩急), 송수(送受), 문답(問答), 호부(好否), 정동(靜動),
승패(勝敗), 영육(靈肉), 찬반(贊反), 표리(表裏) …
영영 맞서서 경쟁만 할 줄 알았다. 웬일인가. 상극에 치닫는 단어가 둘이서 손을 잡고 나란히 붙어 선다. 서로 다르면서 어울리는 방패와 창처럼. 우호적인 것과 배타적인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방어적인 것과 파괴적인 것. 상호 모순된 충동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둘 사이에는 1:1의 평행선상을 유지하면서도 1+1=2의 순리를 빚어낸다. 손을 잡는 것은 기댈 수 있음의 여지이고 서로 돕자는 증표이며 합하여 키우는 힘이다. 그래도 둘의 힘보다는 셋의 힘이 클 터, 다시 내리쳐 셋으로 나눈다.
천지인(天地人), 의식주(衣食住), 진선미(眞善美), 육해공(陸海空), 유불선(儒佛仙),
상중하(上中下), 불법승(佛法僧), 대중소(大中小), 풍여석(風女石), 공가중(空假中),
지인용(智仁勇), 양상제(養喪祭), 일월성(日月星), 자검겸(慈儉謙), 법보응(法報應),
덕공언(德功言), 전현후(前現後), 정신기(精神氣), 조중석(朝中夕), 군사부(君師父),
적녹청(赤綠靑), 초중종(初中終), 지덕체(智德體), 적황청(赤黃靑), 위촉오(魏蜀吳),
조용조(租庸調) …
삼 행에서 풍겨나는, 숨 막히는 언어의 진경을 발견한다. 삼총사의 의리가 서린다. 셋의 어울림. 톡톡 튀면서도 서 있는 순서와 차지하는 영역이 분명하게 그어진다. 그러나 생각이 자꾸 막히면서 둘만큼 잘 나눠지지 않는다. 억지가 붙는다. 게다가 불안한 한 가닥 기분은 어찌하지 못한다. 힘은 커졌으나 세력만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 고독감이 창조의 힘을 분출시키는 도구라 할지라도 셋 중 하나가 너무 외로움을 탈 것 같다. 한 번 더 내리쳐 넷으로 나눠 그 마음을 보듬는다.
천지일월(天地日月), 동서남북(東西南北), 춘하추동(春夏秋冬), 건곤이감(乾坤離坎),
회삭현망(晦朔弦望), 단주모야(旦晝暮夜), 남녀노소(男女老少), 수화토석(水火土石),
효제충신(孝悌忠信), 도천지왕(道天地王), 경사자집(經史子集), 지수화풍(地水火風),
갑을병정(甲乙丙丁), 흥망성쇠(興亡盛衰), 생로병사(生老病死), 동서고금(東西古今),
신언서판(身言書判), 건곤간손(乾坤艮巽), 기승전결(起承轉結), 가감승제(加減乘除),
이목구비(耳目口鼻), 형제자매(兄弟姉妹), 매난국죽(梅蘭菊竹), 연월일시(年月日時),
길흉화복(吉凶禍福), 사농공상(士農工商), 조율이시(棗栗梨柿), 시서예악(詩書藝樂),
문행충신(文行忠信), 원형이정(元亨利貞), 관혼상제(冠婚喪祭), 예의염치(禮義廉恥) …
힘도 힘이려니와 꿍짝꿍짝 율동이 있으니 흥이 돋는다. 네 박자는 안정감마저 불러와 버팀목으로 선다. 나 홀로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인 중창이다. 사방 풍광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넓은 파문은 여운을 크게 그린다. 가늠하기 어려운 통찰력과 포용력을 싸안고 있다. 장성한 4형제가 나란히 선 듯 든든해지기도 한다. 호연한 기운이 솟는다. 내친김에 다시 한 번 더 내리쳐 다섯으로 깨트린다. 생각을 굴리고 펴고 다듬는다. 그런데 내내 보물찾기만 한다.
희노욕구우(喜怒欲懼憂),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
지신인엄용(智信仁嚴勇), 황백적홍청(黃白赤紅靑),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한열풍조습(寒熱風燥濕), 시청후미촉(視聽嗅味觸),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청황흑녹적(靑黃黑綠赤),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희노애락욕(喜怒哀樂慾),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개걸윷모 …
찾아낸 보물 다섯 조각을 주섬주섬 꾸러미에 꿴다. 다층적이고 풍부한 울림을 토해 낸다.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든다. ?도?와 ?모? 사이에 ?개?와 ?윷?이 끼어 서자 ?걸?이 또 그 사이를 파고들어 나란히 선다. 글자들이 늘어서서 동갑내기들 모양으로 어깨동무를 한다. 하얗게 쌓인 눈이 밭고랑을 없애듯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엇비슷해진다. 나누어질수록 차이가 무너져 내리면서 어우러진다. 가까이서 보면 색종이만 있을 뿐인데 멀리서 보면 일사불란한 변화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매스 게임이듯 공동체를 이룬다.
무엇이든 힘들여 이루면 애착이 가기 마련이다. 나눠진 조각 세상을 열 맞춰 세운다. 두 조각, 세 조각, 네 조각, 다섯 조각. 글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뜻을 밝히는 범위가 나눈 만큼 넓어진다. 나눌수록 점점 커져만 가는 기쁨처럼, 인정처럼.
쪼갠 조각들을 유수히 들여다본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시근이 멀쩡하고 당당하다. 그렇다고 혼자만의 비장한 구호는 내세우지 않는다. 서로 손잡고 뭉쳐야 여물고 단단해진다는 이치를 꿰뚫고 있다.
얼마든지 나누고 자르고 쪼개어 보라. 아무리 가른다 해도 세상은 언제나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