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 / 고 옥 란(제20회김포문학상 우수상)
덤 / 고 옥 란(제20회김포문학상 우수상)
사람은 누구나 몸 안에 거대한 양초를 하나씩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생명이란 양초가 피운 불꽃같은 것이어서 뜨겁게 타오르거나 가만가만 타오르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꽃을 피워낸다. 어쩌면 죽음이란 타버린 양초의 꿈인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장수를 누리는 이, 사람의 몸 안에 남아있는 생명의 양초 길이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노화와 죽음은 과학적으로 염색체의 텔로미어 길이와 관련된다고 하는데 질병이나 노화로 인한 죽음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고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양초가 제대로 타지 않은 채로 갑자기 부는 바람에 생명의 불꽃이 꺼져버린 셈이다.
달력을 벽에 걸 때마다 생명의 덤에 대해 생각한다. 빛바랜 것들이 벽에서 분리되고 산뜻한 잉크 냄새나는 새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365일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당연한 숫자처럼 여겨지지만 어떤 절박함의 순간이 찾아오면 더 이상 365일은 평범하고 사소한 숫자가 아니다.
생명의 덤을 청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생명에도 덤이란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던 날, 도화 빛 얼굴의 젊은 여인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던 날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어떤 위기가 생기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이 그래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 되고 만다.
‘아직 젊네요.’ 병동 수녀님이, 침대 발치에 적힌 나이를 보고 말씀하신다. ‘아직’이라는 말은 어떤 것에 견주어 ‘아직’일까? 남은 생에 견주어서 일까, 아니면 다른 이들과 비교해 볼 때 ‘아직’이라는 것일까? 다행히 내 안의 양초는 여전히 타고 있다. 그때 이후 달력을 새로 바꿀 때마다 새로운 한 해를 ‘덤’이라 생각했다. 더 걸어야 할 시간들이 잉여로 주어져서일까 똑같은 거리가 달라 보였다.
‘덤’이란 물건을 사고팔 때 가격을 깎아주는 대신 물건을 몇 개라도 더 얹어주는 것을 말한다. 덤을 받으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마도 덤과 함께 전해진 봉투 안의 온기 때문일 것이다. 자주 가는 야채 가게 아주머니는 눈보라가 치든 태풍이 불든 상관없이 노점을 차린다. 공판장에서 갓 떼어온 싱싱한 야채들 사이 아주머니의 얼굴은 늘 해맑다. 야채가게 아주머니가 덤으로 건네준 고추 한 두 개가 개인에게는 별 게 아니지만 모이면 꽤 상당한 양일 텐데 벌이가 시원찮은 아주머니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덤을 주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새로 자리 잡기 시작한 상인들은 단골 고객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덤을 듬뿍 준다. 덤을 받으면 그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상추나 콩나물을 사게 된다.
늘 다니던 야채 가게가 문을 닫은 지 벌써 며칠 째다. 1년 열두 달 쉬는 일이 전무하던 아주머니 얼굴을 못 본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옆 가게 아주머니에게서 청양고추를 산다. 고추를 몇 개 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가격은 두 배나 비싸다. 야채 값이 폭등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개수가 적은 듯하여
“몇 개라도 덤 좀 주세요.”
“이봐요. 기껏 고추 몇 천 원어치 사면서 우리더러 덤 주라 하면 우린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거 한 박스 떼어오는 데 얼만 줄 알기나 해요.”
쏘아붙이는 아주머니의 말에 공연히 부끄러워졌다. 늘 덤을 주던 그녀가 사실은 이윤이 남아서도, 장사가 잘되어서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온 손이 부끄러웠다. 덤이란 주는 자의 뜻이지 받는 자가 요구할 사항은 아닌 것이다. 덤은 봉투 속의 온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눈물, 또 누군가에겐 희생이기도 하다.
마트에 가면 랩으로 돌돌 말려진 채소들에 가격과 포장 날짜, 바코드가 찍혀있다. 덤을 주는 이도 없거니와 덤을 기대할 수도 없다. 대형마트에서 덤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통시장의 덤과는 다르다. 대형마트의 덤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하나를 더 주는 것으로 사람의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이다. 하나를 집어 들자 샴쌍둥이처럼 딸려오는 것들을 카트 가득 채우고 돌아오면서부터 불필요한 지출이라는 점, 충동구매를 했다는 점에서 후회가 생긴다. 쌍둥이 하나를 더 주기 위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간 단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에 그제야 생각이 미친다.
다시 달력을 바라본다.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어제를 생각한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라 한다. 분명한 것은 ‘오늘’을 산다는 사실이다.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은 별 일 없이 살아온 어제 덕분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오늘은 어제의 덤이다. 당신이 잠든 뒤 눈을 뜬 아침이 다음 생(生) 일지 다음 날(日)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티베트 속담이 있다. 눈을 뜬 순간이 다음 생이 아니라 내일이기를 바란다면 어제의 덤인 ‘오늘’을 대충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내일이 오늘의 ‘덤’이 될 테니까.
고추 몇 개라도 일부러 챙겨 주시던 야채 가게 아주머니의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버렸다 한다. 아주머니에게 신은 생명의 양초를 덤으로 주지 않으셨다.
“그만 주셔도 되어요.”
“어서 줄 때 받아. 딸 같아서 주는 거니.”
그녀는 사계절 내내 거리의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눠주었다. 공짜로 얻은 덤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따뜻한 생명의 온기였다는 것을,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그녀의 온기가 내 안의 생명의 양초에 더하여졌다는 사실을 아주머니가 부재한 지금에야 깨닫는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생명의 온기를 나눠주며 살고 있을까? 붕대처럼 랩을 칭칭 감고 진열대에 드러누운 초록 오이, 어쩐지 내 모습 같다.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는 오이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할머니 가설 / 고 옥 란
익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닮아있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들이 삶 속에서 닳고 닳아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어떤 인종이건, 어떤 지역에 거주하건 사람의 얼굴이 비슷비슷해진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는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얼굴, 수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 중의 중심 어머니’인 할머니의 얼굴이 들어있을지 모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얼굴(vultus)들은 서로 다른 이들을 향한다’고 말했다. 누구든 자기 얼굴의 독자가 되기 위해선 거울 앞에 서야 한다. 거울 면에 비치는 얼굴,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얼굴을 한참 바라본다. 이른 새벽, 할머니는 작은 거울 앞에서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비녀를 꽂았다. 어머니의 화장대에는 고운 향기가 나던 자잘한 분통이 있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던 할머니 모습, 화장대 거울 앞에서 향내 나던 분을 뽀얗게 바르던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지금 전신 거울 앞에 서있는 내 모습. 내 얼굴 어딘가에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얼굴이 오롯이 남아있다.
얼굴의 흔적들을 살핀다. 이랑, 파고, 골짜기, 협곡, 인생의 흐르는 시간이 만든 거대한 물줄기도 있다. 군데군데 깊어지고 휘어진다. 살아온 흔적과 살아갈 날들의 흔적을 본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얼굴에도 나이테가 생겼다. 균일하지 않은 삶의 무늬를 바라보다가 하나의 얼굴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수많은 얼굴들을 미리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얼굴 깊숙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얼굴이 이미 들어있어서 경극배우처럼 역할에 따라 바꿔 쓰는 것인지도 ,,,,
할머니와 어머니가 마주 보고 다듬이질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고부간에 딱히 할 말도 없는 두 사람이 다듬잇돌을 사이에 두고 앉아 다듬이질을 시작한다. 또그닥 또그닥 또그닥 타닥타닥 타아닥 타아닥 강약의 리듬감이 느껴진다. 다듬이질 소리 가득한 한 여름밤,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방망이를 두드렸을까?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을 다듬이 방망이로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도 그렇게 오래전 할머니가 될 누군가와 마주 앉아 다듬이질을 하였으리라. 다듬잇 돌을 두드리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모습을 본다.
‘할머니'의 어원은 세소토어 ‘hara’와 르완다어 ‘umunya’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아이의 보호자’ 혹은 ‘어머니 중의 중심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동물 암컷들은 죽기 전까지 생식이 가능하나 인류 여성들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폐경이 시작된다. 생식 가능한 연령을 지나서도 인류 여성들이 꽤 오랜 기간 생존하는 이유를 과학자들은 '할머니 가설'로 설명한다. 폐경으로 자신의 아이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손주를 돌보는 데 경험과 지혜를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성시켰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실제로 노인 세대 비율의 급증기와 인류 문화 발달 시기는 일치한다고 한다.
모계 사회에서 출산과 양육자로서 여성의 역할은 중요했다. 생명의 자루를 몸에 지닌 여인들은 자궁이 메말라 몸 안에 생명이 뿌리내릴 수 없게 되면 종족을 유지하고 보호하는데 지혜를 동원했다. 농본 사회에서 남성들이 바깥 노동에 주력할 때 ‘어머니 중의 중심 어머니’인 할머니들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전통과 문화 전승자로서의 역할을 담담하였다. 아이들은 한 여름 모깃불 켜놓은 대청마루에 누워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들을 듣다가 까무룩이 잠이 들었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전해온 이야기들에 새로운 이야기들이 또그닥 또그닥 타닥타닥 붙여졌다.
‘한국의 숨소리’라고도 불리던 다듬이질 소리 사라진 도시의 밤이다. 마주 보고 앉아 밤새 두드릴 빨랫감도 사라졌다.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는 아이들도 없다. 몇 번이고 재생 가능한 흥미진진한 유튜브 하나면 아이들의 밤은 지루하지 않다. 정보화에 능한 엄마들은 동호회나 육아 관련 사이트를 통해 정보를 공유한다. 다듬이 소리를 카톡 소리가 대신하듯 전문 성우의 낭랑한 목소리가 할머니의 목소리를 대신한 지 오래다. 전통 사회에서 집안의 중심이었던 할머니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 민간에서 전승되어 온 창세 신화 ‘마고할미 신화’에서는 마고할미가 맨 손으로 성을 쌓거나 산을 옮기고 맨발로 바다를 건너는 거인이나 신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노고 할미’, ‘선문대 할머니’ 신화도 할머니가 신화의 주역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비혼이든, 미혼이든, 기혼이든 세상 모든 여인들이 나이를 먹으면 할머니라 불린다. 여전히 존재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 어쩌면 이미 내 안에 존재할지 모르는 할머니의 얼굴, 할머니가 내 유전자 어딘가에 남기고 간 삶의 표식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할머니가 남겨 준 것은 가슴과 무릎의 언어였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할머니들의 무릎과 품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생존 방식을 터득했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몸은 세월이 흐를수록 굽어가고 왜소해지지만 그래도 무릎과 품은 변함없이 넉넉하고 따스하다. 어머니 중의 중심 어머니인 할머니를 천천히 불러 본다. 할머니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또그닥 또그닥 다듬잇돌 소리와 함께 소환된다. 얼굴 어딘가에서 할머니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볼을 쓰다듬고, 등을 토닥여주던 그 아득한 손길이 되살아난다.
인류를 정신적,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해 주었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를 수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할머니 ‘마고할미’에 이를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은 마고할미처럼 지금도 어딘가에서 세대를 이어주는 징검돌을 놓고 있을 것이고 치마를 활짝 펼치면 세대를 거듭해 전수해 온 지혜와 사랑들이 온 세상에 뿌려질 것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품어주던 할머니들의 따뜻한 가슴과 무릎 학교에서 오래된 미래가 잉태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