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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탉의 도전(외3편) / 이 인 숙2019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당선작

장대명화 2021. 12. 15. 02:28

                            수탉의 도전 / 이 인 숙2019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당선작

 

  수탉이 철조망 틈새 끼인 날갯죽지를 빼느라 발버둥을 친다. 눈망울을 껌뻑이는 붉은 볏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힘겨운가 보다. 틈새가 비좁아 수탉이 탈출하기엔 불가능해 보이건만, 포기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다. 탈출을 향한 집념이 팔월의 태양 볕보다 뜨겁다. 급기야 부리로 땅을 쪼아대며 용을 쓴다. 수탉의 몸짓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오기마져 느껴진다.

  드디어 탈출이다. 수탉이 날개를 펴고 텃밭으로 쏜살같이 내달린다. 철조망 아래 땅을 파헤쳐 틈새로 탈출을 성공한 것이다. 닭이 머리가 나쁘다는 것도 옛말인 것 같다. 철망과 땅의 틈새를 파헤치면 구멍이 생긴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수탉은 볏을 꼿꼿이 세우고 개선장군처럼 풀밭을 활보하고 있다. 그 모습은 더없이 늠늠하다. 수탉의 탈출은 한 번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얻은 값진 성공이다.

  수탉을 바라보다 문득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과연 나는 삶의 주인인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니 목숨 줄인 생업을 쫒느라 종종거리며 살아온 듯싶다. 좀더 넓은 집을 얻고자 애를 쓴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비싼 자동차를 좋은 옷을 입고자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낯선 세계의 도전은 고사하고 제 목숨 부지하고자 일을 찾아 애가 탈 뿐이었다.

   두 딸의 손을 잡고 마주한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누구에게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지 싶지 않아 때론 오기도 부렸다. 매 순간 강해지고자 마음을 다잡았고, 그래도 두려움이 일면 들길을 달려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란 목숨 줄에 천천히 감겨 벗어나지 못한 체 자리를 맴돌았다. 나에게 수탉의 거침없는 도전이 절실하던 터였다.

  생명 앞에선 미물인 닭도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알을 품은 어미닭은 모이를 먹을 때 외엔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알을 품은 채로 잠이 든다. 새끼 외에 그 어떤 것도 욕심 내지 않는다. 오직 알이 깨어 병아리가 되기를 염원 할 뿐이다. 나 또한 아이들을 온전히 지키고자 개인의 삶은 세상 밖으로 내던졌다. 어설픈 감상이나 불평불만을 할 여유도 없었고, 한낮 감정타령은 사치라고 여겼다. 가정의 빈자리와 세 명의 목숨을 위하여 옥석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지난한 환경이 두 아이를 키우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어미의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두 딸은 부족한 보살핌에도 밝은 모습으로 자랐다. 새벽일을 마치고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였다. 아이들에게 부족한 사랑을 아침밥으로 대신이라도 할 fif 바지런을 떨었다. 그렇게 다시 일터로 부리나케 향하던 참이었다. 먼지가 뽀얀 자동차 유리창에 언뜻 무언가 보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것은 ‘엄마 사랑해’ 라고 또박또박 써놓은 문자였다.

  작은 녀석의 필체였다. 평소 표현이 적어 ‘시크소녀’라고 부르는 녀석에게 사랑 고백을 받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아마도 학교를 마치고 오던 길에 적어 놓았으리라. 병아리만 같았던 딸아이가 벌써 어미를 위로해줄 정도로 성장한 것 같아 기특하였다. 딸에무언의 표현은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새벽길을 달려도 지치지 않을 활력소가 되었다.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큰딸이 둥지를 떠나던 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안정된 직장을 마다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겠단다. 처음엔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경쟁이 치열한 광고계에 뛰어든 아이가 불안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가 대학시절 내내 몰입하던 분야였기 때문이다. 딸은 내로라하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외국연수도 다녀왔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접고 직장을 택한 건 엄마와 동생을 염려한 결과였으리라.

  딸은 대입 시험 준비로 무진 애를 썼다. 엄마의 경제적 짐을 덜어주고자 학원도 가지 않던 녀석이었다. 수능시험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독서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최선의 노력을 한 다음에야 다른 대안을 찾는 아이인지라 이번 일도 쉬이 결정하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딸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내 눈에 사회자로 선 모습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연말 회사에서 주관하는 소외된 이웃을 휘한 자리였다. 큰 무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자리를 굳히는 딸이 기특하였다. 아비의 부재와 어미의 나약함에 큰아이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였나 보다. 막막한 현실을 탈출하고픈 의지는 눅보다 강했으리라. 그 덕분인가, 자신의 미래를 지키고자 도전하는 발길에 거침이 없었다. 과연 엄마보다 용기가 넘쳤다.

  딸의 모습은 좌중을 이끌고 있었다. 그날 자선행사가 대성황이었다며 보내온 영상에는 마치 수탉이 풀밭을 누리듯 활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행사를 준비하고자 녀석은 많은 시간 무던히 애를 썼으리라. 딸의 당찬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삶이 고단하다고 절망하지 않아 고맙다.’라고 딸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아이는 이제 걱정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듯 화면 가득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머눈 세상을 돌아본다. 나는 한동안 세상 속 두려움이란 감옥에 자신을 유폐시킨 듯싶다. 두려움이란 실상 그 높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차마 그 깊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지레짐작 느끼는 공포감이리라. 수탉의 탈출과 딸의 거침없는 모습이 나를 일깨운다. 이제 딸에게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마음 깊이 숨죽인 모든 감각과 의지를 일깨우리라. 꿈을 마음껏 펼쳐 보고픈 강한 의욕이 불붙듯 일어난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수탉의 자태가 늠름하다. 먹이를 사냥하고자 흙을 헤집는 발길질에도 힘이 넘친다. 울안에만 머물렀다면 흙속 산해진미와 새싹의 향긋함을 어찌 맛보았겠는가. 비록 수탉의 일생이 인간의 위해 존재한다고 하나 삶을 선택할 권리는 자신에게만 있다. 불굴의 도전이 있었기에 울안이 아닌 풀밭의 터전을 얻은 샘이다.

  용기도 절망도 자신에게 달려 있다. 삶에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어디 있으랴. 고통의 원인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 극복하는 일 또한, 스스로 감당해야만 한다. 모난 돌이 몽돌이 되기까지는 거친 물길에 쓸리고 부딪히는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야 한다. 머물러 주춤거린다면 무엇 하나 얻을 수 없으리라. 수탉의 몸부림에서 포기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거침없는 도전 정신을 깨우친다.

  새로운 두려움이 아닌 도전의 장이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끝없이 물길을 다독여 강으로 바다로 주저 없이 나아가야만 한다. 저기 붉은 볏을 꼿꼿이 세운 수탉이 걸어오고 있다. 마치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딸들이 엄마에게 걸어오는 모습만 같다. 이제 딸들에게 나의 참 모습을 보여줄 차례이다. 가슴에 품은 꿈을 향하여 신발 끈을 단단히 묶는다.

 

                                                                       마당에서 / 이 인 숙

  햇살 가득한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다. 지인이 새로 주인이 된 농가이다. 그녀는 집을 원한 것이 아니다. 본가로 드는 길이 좁아 넓힐 요량이다. 무너진 사랑채와 토담에서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담장에 부딪힐까 아슬아슬하게 드나들던 좁은 길이 훤하게 뚫리는 날, 마당은 흔적 없이 사라질 운명이다.
  나의 마음은 수시로 농가로 달려가 마당을 서성인다. 한때는 가을걷이로 마당 가득 곡식이 넘쳐났고, 어둑해질 무렵까지 아이들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리라. 그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품은 채 곧 사라질 마당의 처지가 안타깝다. 불현듯 기억 저편에 자리한 마당 깊은 집이 떠오른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대문은 마당보다 높다. 이름만 대문일 뿐 사철 문이 열려있는 집이다. 번화한 도시에 요행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 좁은 골목길을 오르면 푹 꺼진 마당이 한눈에 보인다. 대문보다 지대가 낮은 곳에 집을 지은 탓이다. 안채와 작은 사랑채에 아홉 식구가 북적거리던 곳, 애증이 넘치던 그곳을 나는 마당 깊은 집이라 부른다.
  마당 깊은 집으로 향하던 첫날이 눈에 선하다. 평소 즐겨 입지 않던 불편한 옷차림처럼 어색한 자리이다. 직장 상사인 아버님은 반가웠으나 어머님은 처음이라 조심스럽다. 전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들에게 물어 차리셨다는 밥상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하다. 당신만의 방법으로 나를 반겨주신 것이다. 마당 깊은 집은 그날의 어색함도 설렘도 소리 없이 품고 있다.
  마당 깊은 집, 텃밭 모퉁이 자리는 어머님의 특별한 공간이다. 아니 우리도 종종 그곳을 이용한다. 당신이 보이지 않아 집안을 둘러보면 텃밭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열중하는 모습이다. 당신은 땅을 파낸 둥그런 웅덩이에 온갖 것을 넣고 불을 피우고 있다. 가끔은 아버님이 사주신 밍크도 며느리가 아끼는 재킷도 당신의 불쏘시개로 쓰인다. 어둡고 메케한 연기가 마당에 자욱하다.
  도무지 당신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마음에 상처가 깊어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이지만, 느닷없는 당신의 말과 행동이 나를 공격한다. 어머님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시아버님과 재혼하셨다. 세 살 된 막내에 그 위로 네 명의 전실 자식이 있으니 어린 자식 일곱을 키우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아버님의 성실함과 어머님의 알뜰함으로 칠 남매는 건강하게 자랐다. 하지만, 살림에 여유가 생기고 화목해지자 가까운 이들은 왜곡된 시선으로 분란을 일으킨다. 오해는 마음으로 낳은 자식을 돌아앉게 했고, 당신의 지친 마음마저 무너뜨렸다.
  당신의 삶은 뒤로 한 체 자식을 지키고자 모든 짐을 짊어졌으리라. 한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바로잡고자 자신과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으리라. 하지만 누굴 탓하랴. 자식은 부모의 눈빛에 몸달아하고 부모의 사랑을 받고자 해바라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덧없는 사랑과 미움은 빗나간 서운함으로 가슴에 메우지 못할 깊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어머님은 이유 없이 역정을 내는 일이 잦아진다.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앓아눕는 당신을 대학병원에 모신 참이다. 밝아지던 모습도 잠시 다시 역정을 낸다. 아무렇지도 않은 당신을 환자랍시고 병원에 입원시켜 모욕을 겪게 한단다. 어쩌랴. 박사님께 인사드리고 퇴원하자며 진정부터 시킨다. 마침 처방 없이 먹던 약들이 걱정스러워 성분을 의뢰한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다. 의사는 약은 이미 어머님께 친구와 같다며 갑자기 끊지는 못할 것이라며 조금씩 줄여가자고 말한다. 오죽하면 약을 친구로 삼았을까.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당신은 다시 아기처럼 평온한 모습이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부아가 불같이 일어난단다. 그럴 때면 옆에 있는 며느리에게 불똥이 튄다며 내 손을 꼭 잡는다. 바로 처음 만나던 그날의 따뜻했던 손길이다.
  마음결에 불길이 솟아 텃밭 웅덩이로 달려갔을 당신의 마음을 이제야 가늠한다. 아버님이 사준 모피가 무슨 소용이랴, 자식도 며느리도 당신 편이 아닌 듯 서운했으리라. ‘계모’라는 주위에 수군거림도 어머님의 마음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으리라. 당신의 속을 보여줄 수 없으니 덧난 상처를 감추고자 마음속 깊은 웅덩이를 찾았던 것은 아닐까. 가슴에 화가 솟으면 습관처럼 가슴에 일어난 불보다 웅덩이에 더 큰불을 지핀 것이다. 아마도 당신의 삶이 짙은 연기로 내려앉을 때 온갖 시름도 녹아내리길 간절히 원했으리라.
  깊이 파인 마당은 당신의 침묵이자 삶의 증거이다. 마당은 애증으로 가득한 당신의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당신에게 마당 깊은 집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고통을 삭이는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순간 웅덩이에 스러지지 않은 불꽃이 당신의 대답인 양 일렁이는 듯하다. 그 불꽃이 내 가슴에도 일렁이는가. 잊고 지냈던 마당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동안 당신의 말 없는 행위에 놀란 내 가슴만 쓸어내릴 줄 알았지, 애달픈 당신의 마음을 헤아릴 줄을 몰랐다.
  농가의 마당을 바라보며 이제야 당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품고 살았던 것일까. 내 가슴은 마른 먼지만 휘날리는 마당이었던가 보다. 그러니 그 무엇도 온전히 품지 못한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보니 농가에 저녁노을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오늘 같은 날 당신과 마당에 멍석 깔고 앉아 오래도록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당목 / 이 인 숙

 

장삼 자락이 큰 북 위를 춤추듯 넘나든다. 범종각 아래 모여든 사람들 표정도 다양하다. 소리에 다소곳이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엄숙한 현장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담는 사람도 여럿이다. 내 앞 어린 남매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간다. 아이들의 몸짓에서 금방이라도 범종각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사물 소리를 찾아 산사에 오른 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개인의 행동반경은 점점 좁아진다. 늦은 점심을 먹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고자 산사로 오르는 길엔 적송과 단풍나무가 줄느런하다. 서둘러 붉은 갓을 쓴 나무는 자신의 키보다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문득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개인의 자유라는 왜곡된 행동이 온 나라를 코로나 펜데믹에 빠트린다. 그들은 마치 돌아올 수 없는 막장으로 향하는 것만 같다. 무엇을 향한 몸짓인지 도통 분간이 어렵다. 어지러운 생각을 지우고자 빠른 걸음으로 산사로 향한다.

연화교를 건널 즈음 해는 서산을 넘는다. 태양의 여광이 남아 주변은 그리 어둡지 않다. 사천왕문에 들어서자 가사를 입은 스님들이 마당을 지나 범종각에 오르고 있다. 전각 왼편 금동 미륵 대불은 멀리서 보아도 그 모습이 웅장하다. 33m 장신인 대불님도 전각 지붕에 턱을 고인 채 사물의 울림을 기다리는 중이다. 법고 소리를 시작으로 저녁 예불이 시작된다. 불교에서 법고를 치는 것은 모든 중생이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란다. 코로나19로 인해 지친 이들의 날 선 비판도, 멈추지 않는 거친 언행도 법고 소리에 잦아들기를 기원한다.

스님의 발길이 법고와 목어를 지나 범종에 머문다. 당목의 힘찬 움직임에 깊고 장중한 소리가 높은 능선을 타고 흐른다. 범종의 울림과 동시에 당목이 심하게 흔들린다. 스님의 장삼 자락도 왼쪽으로 두 번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나무에 묶은 줄을 잡고 헛몸짓에 따라 출렁인다. 순간 그의 헛몸짓이 당목에 고통이 들어간다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 깨어지고 부서지는 듯한 고통, 열반에 든 스님의 다비식에서 ‘스님, 불 들어가요’라고 소리치는 듯 애절한 몸짓만 같다. 당목의 몸짓이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치료제와 백신으로 한숨 돌렸다고는 하지만, 조심스럽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는 깨어지지 않을 단단한 쇠뭉치만 같다. 학자들도 의료진도 더 정확한 치료제를 만들고자 고심 중이다. 바이러스와 마주한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다. 밖으로 대책 없이 나섰다가 황망히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는 이도 늘어난다. 일상이 날로 흉흉해진 탓에 사람들은 단단히 입을 봉하고 대문을 걸어 스스로 격리에 든다. 거리는 한산하고 상점은 사람들 발길이 뜸하다. 기업은 재택근무를 택하고 학교는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한다.

나 또한, 딸아이가 출퇴근길에 감염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결국 딸과 출퇴근을 함께하기로 한다. 아이를 직장에 내려주고 데려가다 보니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여 늘어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고달프고 갑갑하다 하여 방역지침을 거부할 수도 없다. 차갑고 단단한 범종을 치는 당목의 심정이 바이러스와 마주한 우리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범종의 깊은 울림은 한없이 무른 나무, 당목의 희생이 얻어낸 소리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리라. 개인의 불편함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절실한 때이다.

엄지손가락을 힘차게 치켜든 이가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코로나19에 감염된 환자들을 돌보는 의료진의 모습에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그들이라고 왜 두려움이 없으랴. 환자를 간호하다 감염된 의료진이 치료 후 집이 아닌 곳에 홀로 격리에 들어간다는 소식도 들린다. 가족과 사회를 지켜야 하는 책임감에 외로움을 감수한 선택이다. 사회적 역할을 다하다 안타깝게 감염이 된 와중에도 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수 없었으리라. 집이 아닌 홀로 지낼 곳을 찾은 마음이 오죽하랴. 그인들 가족에게 의지하여 쉬고픈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개인의 욕구가 아닌 가족과 이웃을 배려하는 모습에서 범종의 의미를 깨우친다. ‘힘을 냅시다. 코로나 19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의 외침이 코로나19를 물리칠 장중한 울림이 되어 흐른다.

당목과 범종은 전혀 다른 물질이나 한 몸과 같다. 쇳덩이에 스민 깊고 장중한 소리를 이끈 주인공은 둘이 함께이어야만 가능하다. 당목의 재료인 나무는 무르고 약하다 할 수 있으나 그 의미는 강하다. 나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존재가 아닌가. 코로나19 최전선으로 기꺼이 나선 의사들이 바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나무, 당목이 아니랴.

용기는 어떠한 두려움도 이겨낼 힘을 지녔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소리 없는 전쟁터에 나선 전사의 마음과 무엇이 다르랴. 두려움이 아닌 기필코 이겨내리란 자신감으로 코로나19와 대항한다. 당목이 단단한 쇳덩어리 범종을 기운차게 때려 장중한 울림을 이끌어내었듯, 개인의 작은 희생이 따를지라도 기필코 이겨내리란 강한 의지만이 깊은 울림으로 돌아오리라.

스님이 마지막 사물 운판을 치고 범종각을 내려선다. 마스크를 쓴 귀여운 두 녀석이 그제야 부모의 품을 파고든다. 코로나 펜데믹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희생을 마다치 않는 이들의 고난이 더는 깊어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우뚝 선 미륵대불의 시선이 어두워진 길을 나서는 중생을 향한다. 당목도 그제야 흔들림을 멈추고 조용히 산사의 밤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