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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루떡 / 노 혜 숙

장대명화 2021. 10. 20. 23:23

                                                       시루떡 / 노 혜 숙

 

 쥔장, 숨이 막힐 지경이네. 나를 이 곰팡이 냄새에서 좀 해방시켜 주게.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싶네. 무엇보다 사람의 손길과 호흡이 간절하게 그립네. 그것이 내 존재의 목적이고 기쁨이란 건 쥔장도 잘 알지 않는가.

 

 지난번 개봉도 안 된 채 고물상으로 실려 가는 동료들을 보았네. 잉크 냄새가 채 가시기 전이었지. 모든 것이 버튼 하나로 사라지는 세상에선 더 이상 폐지 압축공 '한탸'*의 낭만을 기대하기 어려울 걸세. 그는 폐지로 쏟아져 드어오는 온갖 진귀한 책들을 읽으며 그들의 사상을 사탕처럼 빨라 흡수하던 인간이었지. 조만간 나도 '한탸'가 하루 수 톤씩 처리하던 폐지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일세.

 

 가자미눈으로 당당하게 책장에 입성한 책들을 바라보네. 시루떡처럼 바닥에 쌓인 채 구석에 갇힌 내 입장에선 부럽기 그지없네.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노암 촘스키, 헤로도토스에 노자, 신영복 등등 책깨나 읽는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이름들이네그려. 몇몇 고개 숙이게 하는 책들이 있긴하지만 허명에 금박한 번지르르한 책들도 많구먼.

 

 책들의 면면을 보면 쥔장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네. 갈피갈피 밑줄 쳐진 문장들을 분석해 보건대 생에 대한 고민과 애착이 남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겠네.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만하면 균형 잡혀 있다 할 수 있겠고. 그럼에도 언뜻언뜻 허기와 결핍의 그늘이 느껴지네. 갈증이 허영의 치레를 과하게 덧칠한 흔적도 보이고 말일세.

 

 길을 찾았는가, 그 번듯한 이름의 책들 속에서. 내 보기엔 대부분 고만고만한 자기 생의 고백이거나 방황의 궤적인 듯싶네. 물론 통찰력과 상상력, 사유의 수준에 편차는 있을 걸세. 혜안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단 1mm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네. 어쩌면 그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긴 자들에 의해 문명은 발달한 것인지 모르지.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울퉁불퉁, 공평하지 않네.

 

 이런 풍경은 어떤가. 아롱이다롱이가 모인 평범한 세상 말일세. 저마다 제 모양대로 피어난 들꽃을 보면 비교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게 되네. 모든 존재가 저마다 생명의 찬가를 부르며 생기를 뿜어내지. 존재 자체로 충만한 삶이 인드라의 구슬처럼 연결되어 있지 않던가.

 

 천덕꾸러기처럼 바닥에 켜켜이 쌓인 저 수필집의 함성을 들어보게. 생의 꽃밭을 알록달록 물들이되 과하지 않게 자기 노래를 읊조리는 저들이 바로 들꽃처럼 세상의 밑그림을 그리는 존재들 아니던가. 개중엔 엉겅퀴처럼 고고한 척 가시를 세운 것도 있고, 무더기무더기 비슷한 꼴로 군락을 이룬 것들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네. 하지만 제아무리 우뚝하다 한들 홀로 숲이 될 수는 없는 법일세. 사실 우뚝한 것들을 받치고 있는 것들은 작디작은 풀꽃들 아니던가.

 

 쥔장, 머니와 속도, 감각이 지배하는 사차원의 세계에서 그렇고 그런 일상의 해석들이 무슨 큰 흥미가 있겠냐고 업신여기지 말게. 돌아보건대 인생의 평온과 행복은 그렇게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 속에 있지 않았던가. 오늘은 부디 저 시루떡 중 한 켜를 들어내 일독해 보시게. 눅눅한 일상에 분꽃 한 송이 피어날 것이네.

 *한탸: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도둑』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