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톱입니다 / 권현옥
나는 손톱입니다 / 권현옥
손에는 ‘등’과 ‘바닥’과 ‘가락 이 있다. 오래되고 익숙한 은유여서 누구도 놀란 빛 하나 띠지 않겠지만 손에 ‘톱’도 있다면 살짝 놀랄 만하지 않은가.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절단기구, 손톱은 손과 톱의 합성어이다. 손에 달린 톱이란 뜻이다. (15세기엔 돕, 돖, 톱으로 쓰임) 돕(爪조)은 포유류나 새나 파충류의 손톱 발톱을 말하고 톱(鋸거)은 연장을 말하지만 결국 동원어로서 함께 쓰였다.
손등, 손바닥, 손가락은 생김에 기인한 조어지만 손톱만은 기능에 의한 조어이다. 손톱이야말로 손을 가장 유능하게 하는 공신인 것이다.
당신은 오늘 외출할 때 나 때문에 고민하는 눈치였다. 어젯밤 나는 당신의 염색한 머리를 헹구며 머리칼 사이로 헤치고 들어가 두피를 문질러 주었다. 톱니를 살짝 세워 통증과 쾌감이 교묘히 만나는 장소로 당신을 데려갔지만 검은 염색약이 나마저 물들여 놔서인지 당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것 없다. 나도 내가 호사스런 태생이 아님을 알고 있고 열심히 일하고 난 뒤의 흔적에 수치를 느낄 때도 있다. 아침에도 식탁에 말라붙은 음식물을 긁어내고는 찝찝했지만 닦아내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내 능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수식을 붙이자면 만능손톱 아니겠는가. 약하긴 하지만 공구세트 하나쯤과 맞먹을 수 있으니 당신은 나를 즐겁게 닦으면 된다. 연장이란 쓰고 나면 잘 아껴줘야 하는 법이다.
닦고 정돈한 후엔 내가 끌과 톱과 호미와 가위와 칼과 갈쿠리였다는 것을 잊어도 된다. 섹시한 신체의 일부거나 장식품이길 원하면 나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아야 함을 안다. 머리를 긁는다든지 콧속을 만진다든지 몸을 긁적거린다든지 그리고 은근히 갈아놓은 톱날을 세우며 짐승의 발톱과 같은 기능이 있다는-인식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도 당신의 손끝에서 철이 좀 들었다.
유일한 야수의 흔적인 손과 발의 톱, 이것이 나의 매력이다. 나의 몸은 손가락에 붙어 혈액의 붉은 빛을 내비치는 곳과 그로부터 더 나와 있는 부분이 있다. 힘은 前者에서 나오고 개성과 매력은 초승달 모양의 여분-後者에서 나온다. 하루 0.1mm 이상 끊임없이 자라니 난들 다소곳하기가 쉽지 않다. 파고 싶고, 긁고 싶고, 풀고 싶고, 할퀴고 싶고, 자르고 싶고, 끊어내고 싶고, 집고 싶어 간질간질하다. 머리카락과 새의 깃털과 황소의 뿔처럼 죽어있는 세포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알지 않는가. 내가 얼마나 촉각도 없이 하루 종일 예민한 일을 대신해준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당신은 나를 무단히 써먹긴 해도 함부로 하진 않는다. 당신의 몸에서 지금도 자라나는 것, 당신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것은 손톱과 발톱과 머리카락이다. 당신은 가끔 엉킨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잘라내고 마음에 안 드는 낯선 머리를 보면서 이전의 당신과 생이별 하는 걸 보았다. 그런데 나와의 이별은 좀 다르다. 나를 톡톡 끊어낼 때면 마음의 수런거림이 없어 보인다. 바쁜 일상의 끝을 날려 보내듯 시원해 하는 것 같았고 게으름의 싹을 자른 듯 결연해 보였다.
한 줄기 아린 따가움이 있는지 모른다. 어릴 적 친구의 얼굴을 할퀴었던 기억이나 혈기로 사랑이 차분하지 않던 시절, 공격적 앞발톱을 세운 기억과 치근대는 손길을 뿌리치다 그만 상처를 내고 만 방어적 앞발톱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손등이나 손바닥이나 손가락이었어도 됐던 공격에 내가 끼어든 기억 때문이다. 미안한 기억이 더 자라지 않게 자르는 것 같았고 미래에 일어날지 모를 공격성을 예방하며 자르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은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아세톤으로 닦아냈다. 당신은 좀 놀라고 실망한 듯했다. 화려한 손톱에 비해 많이 늙어 보이는 손등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생명 없이 자라서인지 쉽게 늙지 않는다. 당신의 머리보다도 빨리 조건반사에 임해야 하고 체내의 중금속도 배출해야하고 할 일도 많아서인지 세월의 영향을 덜 받는 혜택을 누린다. 다행인 것이다. 죽을 때까지 움직여야하는 당신에게는 손등의 주름보다 나의 여전함이 더 좋지 않겠는가.
이제 괜찮다면 힐끗힐끗 보아왔던 네일숍으로 가도 좋다. 나는 귀걸이나 목걸이처럼 소란스럽게, 자존심을 잔뜩 물들이고서, 찬란한 채광을 받는 테라스 지붕처럼 화사하게, 연장이 아닌 장식품으로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