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빼고 세상 살기 / 조명래
힘 빼고 세상 살기 / 조명래
프로골퍼 전인지 선수가 어제 텔레비전에 나왔다. 남녀 프로 메이저대회 역대 최소타 신기록을 세우고 금의환향한 ‘메이저 퀸’이다. “까다로운 코스가 좋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 즐겁다. 메이저 대회가 주는 압박감이 오히려 즐겁다.”면서 투지를 불태우는 22살 전인지 선수의 얘기를 들었다. 지난 18일 프랑스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최종합계 21언더파를 기록하였으니, 골퍼들은 물론이고 우리 국민 모두의 자존심이 된 그녀가 아닌가.
근래 들어 운동신경이 느슨해지는가 하면 신체에 활기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이 초조해지는 일이 잦다. 평생 다녔던 직장에서 물러나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건강 유지 차원에서 육체활동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오전에 수영장에 나갔다가 오후에 골프 연습장에 나간다. 가끔 집사람과 탁구장에도 간다. 다행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수영장, 탁구장, 헬스장, 골프 연습장까지 있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마음과는 달리 잘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힘을 빼는 일이다. 오늘은 힘을 빼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수영장에서 빨리 가려고 힘차게 필을 젖거나 가라앉기 않으려고 다리를 버둥거릴수록 몸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오후에 나간 골프 연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계란을 쥐듯이 살며시 클럽을 잡아야 하는데 펀치를 날리는 권투처럼 힘껏 쥐고 휘두르니 될 턱이 없다. 탁구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손목에 힘을 빼야 함은 물론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지만 성과가 나지 않는다. 입으로 말은 쉽게 하지만 실제로 힘 빼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과한 욕심 때문이다. 상대보다 잘해야 한다거나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문제이다.
육체적인 운동은 물론이지만, 그 외에도 힘을 빼야 할 일이 많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할 때도 얼굴에 힘을 빼야 표정이 온화해지고 눈에 힘을 빼야 상대방이 다가온다. 내 어깨에 힘을 빼면 내가 행복해지고,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내 주변에서 멀어져간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는 말은 건장지고, 무례하고, 잘난 척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소화기 내과 전문의가 변비환자에게 어깨에 힘을 빼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환자들은 변비는 치료하지 않고, 어깨 힘 빼기만 가르치는 것이 불만일 수도 있으리라. 살다 보면 힘을 넣어야 할 때도 있겠지만 빼야 하는 일 또한 그에 못잖게 많다. 나는 지금 힘 빼고 세상 살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설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전인지의 스윙동작은 부드럽다. 팔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한마디로 자연스럽다. 그녀가 친 공은 정확하면서도 멀리 날아간다. 강력한 동작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동작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탁’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푸른 잔디를 떠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 전인지가 부럽기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처럼 젊지도 않고 골프에 성적을 내고자 하는 욕심도 없다. 다만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물 흐르듯 순리대로 백수생활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프로골퍼 전인지 선수의 수첩에 적혀 있다는 ‘신나게, 즐겁게, 몰입하기’라는 구호가 가슴에 와 닿는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 길은 ‘힘 빼고 세상 살기’의 실천이다.
넝쿨 / 권오훈
전화벨이 울린다. 화면에 ‘어머니’라고 뜬다. “내일 온다캐놓고 그 사람이 시방 근처까지 왔다카네. 빨리 좀 온나.” 어머니는 어제 낯선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의 옛 제자인데 미국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합천 처가에 온 김에 찾아뵙겠다고 했다.
별별 사기꾼들이 다 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온 터라 오지 않아도 된다고 극구 만류했다.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전화해준 것만도 고맙다고 했다. 사모님이라도 뵙고 가야 마음의 짐을 덜겠다며 기어코 찾아오겠다고 한다면서 불안해하셨다. 내가 합석하겠다고 안심시켜 드렸다.
부리나케 달려가니 손님들은 이미 와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다과를 준비하느라 부산하고 부부는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둘러본다. “고희 기념사진엔 살이 찌셨는데 아드님 대학 졸업사진에는 젊을 때 모습이 남아 있군요.”
내 나이를 묻고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 스물네 살에 내가 태어났으니 그 제자와 나의 나이 차는 고작 열두 살아다. 총각 선생인 줄로만 알았고 처자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단다. 가족 얘기는 하지 않으셨나 보다.
차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공부는 제법 했지만 우물 안 개구리였다. 6학년 때 초임교사가 담임을 밭았다. 학교가 파하면 농사일에 붙잡힐 그와 친구를 하숙방으로 데려가 보충 지도해 주었다. 두 사람만 읍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이후 그는 갖은 고생 끝에 미국 유학까지 가서 의사가 되었다. 고마움을 늘 마음에 간직했다. 몇 해 전 부산시에 국장으로 근무하던 친구가 수소문 끝에 은사님을 찾아뵈었다며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집을 나설 때 그가 어머니께 봉투를 건넸다. 그들을 배웅하고 들어가니 어머니는 놀란 얼굴이다. “봉투 안에 백만 원이나 들었더라. 이래 과한 걸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 표지에는 한글 이름과 미국 주소가 영어로 적혀 있다. 형제 대화방에 그의 얘기를 올리니 동생들은 “대단한 제자다.” “아버지의 열정에 자부심을 느낀다.”라며 댓글을 보내왔다.
동생들의 반응을 전하며 교육자의 보람이 이런 게 아닐까 고무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느닷없이 넋두리하셨다. “남들한테 그래 잘 한다고 마누라를 5년 동안이나 동시 시집살이 시킸는가? 내가 어린 너그 델고 고생한 거 생각하믄….”
아버지는 어려운 농촌 형편에 당신을 공부시켜준 형님 내외분께 큰 빚을 졌다고 여겼다. 보답의 의미로 집안일을 거들라며 갓 결혼한 새댁을 남겨놓고 멀리 경남 고성으로 혼자 부임했다. 어머니로서는 기막힌 일이지만 거역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방학 때 귀향한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큰어머니께 덜미를 잡혔다. 한 해만 더 있어 달라는 형님의 부탁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당기는 넝쿨 같았다. 박봉을 모아 소 한 마리를 사드리고 5년 만에 살림을 났다. 어머니는 힘들었던 시집살이와 부엌도 없는 쪽방에서 구차스레 살던 때를 떠올리니 서러움이 북받쳤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휴지를 뽑아 눈자위를 누르다가 코까지 팽 풀었다.
집 앞의 삼필봉을 자주 오른다. 높지는 않지만 숲이 우거졌다. 소나무와 참나무 군락을 지나면 칡과 으름 넝쿨이 무성한 지대가 있다. 넝쿨이 소나무 둥치를 타고 올라가 가지를 휘어 감았다. 햇빛을 받아야 탄소동화작용으로 생존하는 식물의 본성이다. 가지는 넝쿨에 감겨 위로 뻗지 못하고 아래로 휘어졌다. 뒤에서 끄덩이를 잡힌 여자의 머리 모양이다.
부모님이 별로 입에 담지 않아 잘 모르고 지낸 일이다. 늘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입장이 이해는 된다. 싹수가 보이는 학생을 잘 지도하는 일로나마 가족을 데려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달래려 했을까. 어머니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일이고 안타까웠던 일이니 애써 피했을 것이다.
큰 어머니로서도 홀시부 모시고 4대 봉제사에 올망졸망 여덟 명의 자식 키우며 바깥일에 더 관심 많은 큰아버지 몫까지 농사일을 해내야 했다. 일손을 나누던 막내시누이마저 시집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라 걱실걱실 일을 해내는 아랫동서를 선뜻 놓아주기가 쉬웠을까. 살림나면 시모님 소리까지 들어가며 편한 삶이 예상되는 동서에 대한 시샘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이제는 잊을 만도 하건만 새삼스레 그때를 떠올리며 서러움에 겨운 걸 보니 어지간히 한 맺힌 세월이었던가 보다. 성공한 제자가 찾아온 것은 어머니 희생의 보람이 아닐까. 오늘 같은 보람과 아버지의 연금으로 나름 편안한 여생이 늘 어머니를 생각하고 걱정했던 아버지의 속 깊은 마음 공덕이라 여기라며 궁색한 말로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