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자와 칫솔 ㅡ 김경화
녀자와 치솔
김 경 화(연변작가)
치솔질을 하고싶다. 아기를 가져서부터 밴 습관이다.
하얀 타일이 앙증맞게 빛뿌리는 세면실에 쪽걸상을 깔고앉아 치솔에 치약을 듬뿍 짜가지고 부걱부걱 거품을 일구며 하는 신나는 치솔질.
찰떡처럼 달라붙는 졸음을 간신히 떼여던지며 새벽같이 일어나야만 했던 때가 있었다. 택시를 몰고 아침영업을 나가는 오빠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기에 항상 새벽밥을 해야만 했던것이다. 쪽걸상을 깔고앉아 입안 가득 흰거품을 만들어가며 열심히 치솔질을 했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상큼하고 조금은 알알한 그 맛을 느끼며 쓰악쓰악 치솔질을 해대며 나는 입덧으로 메슥메슥한 가슴을 달래며 아침메뉴를 짜고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하루를 열어나가군 했다.
그동안 스스로 준비하여 치른 결혼, 시누이의 비운의 죽음, 그리고 숙명처럼 내게 얹혀진 시조카와 택시영업을 하느라 우리 집에서 살게 된 오빠와,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내게 느닷없이 날아온 예쁜 싹 하나까지… 내 심신은 말그대로 지칠대로 지치고 신경은 송곳처럼 날카로와져있었다.
시누이의 사후처리때문에 법원을 발바닥이 다슬도록 다녔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없던 갑갑함속에서, 아홉살나는 시조카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 하루에도 몇번씩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면 그때마다 배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화를 낼수 없다고 스스로 달래던 그 어쩔수 없던 나날들에 나는 치솔질을 하면서 내 속의 인내와 만나군 했다. 당장이라도 터질듯하고 소리소리 지르고싶던 그 마음을 싸―싸― 치솔질로 다스리면서 인내라는 나의 지탱점을 찾는 순간이면 내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것이였다.
그러면서 나는 결국 삶이란 수없이 많은 인내에 그치는것임을 알아갔다. 내가 나를 인내할줄 알 때 삶은 비로소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것인가? 남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쑥대밭인 우리 집은 그래서 그런대로 흔들림없이 그럭저럭 흘러왔던것일가?
막연한 서글픔같은것이 시시때때 마음 가득 차오르면 그때마다 치솔에 치약을 듬뿍 짜서는 썩썩 치솔질을 해댔다. 화풀이하듯 치솔질을 하는 셈이다. 그렇게 한바탕 치솔질을 해대고나면 마음도 가벼워지고 몸도 머리도 맑아지는것이였다. 내가 취해야 할 태도도 알것 같았고 무엇을 할것인가도 생각날것 같았다.
치솔질을 하면서 가끔씩 거울을 할끔거려보면 거기에 약간 부풀어오른 배를 내민 내가 보인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속에서 조금씩 커가는 생명과 수없이 많은 무언의 대화들을 나누기도 했다. 좀더 충분한 준비속에서, 좀더 좋은 환경을 대기해놓고 너를 맞아야 하는건데 그러지 못하는 엄마를 리해해달라고, 엄마가 좀더 씩씩할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그리고 넌 이 엄마를 위해서라도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나서 엄마의 곁으로 달려와야 한다고.
그럴 때면 느닷없이 새 힘이 솟구치기도 했고 아기에 대한 애정도 남다른것 같았다. 그리고 누구도 침입할수 없는 아기와 나 둘만의 대화공간을 만들어간다는것이 참으로 흥분되게 했고 기분이 좋아지는것이였다.
신들린듯 신새벽에도, 한밤중에도, 낮시간에도 시도 때도 없이 해대는 나의 치솔질이였다. 그 힘든 나날에 친정엄마처럼 포근히 감싸주고 힘을 주던 치솔질, 그렇게 시작된 치솔질은 이제 내 생활의 한부분으로 되여버린것이다.
그동안 시누이의 사후처리도 일단 접어놓았고, 시조카도 학교로 보내고 오빠도 멀리 돈벌이 가고 없다. 이쁜 내 싹도 건강하고 잘생긴 아들이 되여 아장아장 달려온게 어제같더니 이제는 막 7개월을 넘어서고있다. 아들애는 아마 뒤죽박죽인 이 엄마가 안쓰러워 너무도 훌륭한 모습으로 달려왔던 모양, 탈없이 건강하고 뭐든 납죽납죽 잘도 받아먹고 별로 보채지도 않아 나는 아기엄마답지 않게 몸도 축가지 않고 얼굴에 잠도 없다. 그러나 한국으로 간 언니가 맡긴 조카애때문에 또다시 어둠을 안고 일어나 새벽밥을 해야 하는 나는 요즘도 새벽같이 일어나 치솔질로 하루를 연다.
열심히 치솔질을 하고나면 개운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수가 있다. 그런 날은 누구를 만나도 기분이 좋다. 모든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희망으로 부푼다. 그러나 어쩌다 아침치솔질을 빼놓은 날이면 왠지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하여 수저를 들다말고 또 세면실에 달려들어가 쪽걸상을 깔고 앉는다.
나는 무척 고집이 센 녀자로 평정이 나있다. 여지껏 내가 하려는 일이 내 주견을 굽혀본적이 아마 내 기억에는 없다. 자존심 하나만을 최고로 알고있는 나이다. 그런데, 그보다 한수 더 떠서 태산보다 더 견고한 남편의 고집이라니! 평소에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미이지만 일단 한번 고집을 부린다하면 누구도 당해내는수가 없다. 생각같아서는 확 달려들어 누가 이기나 보자, 하고 맞불이라도 질러보고싶은적이 수백번도 더 되지만 그러나 너무나도 뻔한 결과에, 또 이 가정의 안녕을 위해서 나는 어쩔수 없이 내 고집을 꺾어야 하고 자존심을 죽여야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귀아귀 치솔질을 해댄다. 떨리는 손을 가누면서 천천히 천천히 치솔질을 하노라면 마음은 조금조금 가라앉는다. 그러면서 나는 슬프게 감내한다. 아, 한가정의 주부로, 안해로, 엄마로 살아가려면 때론 아리도록 아픈 마음을 누르면서 자신을 구겨야만 함을. 그리고 그것이 한 가정을 평온하게 이끌수 있는 길임을 말이다. 그렇게 세상 다 살아버린 녀자처럼 착잡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더 이상 화내려고 해도 나지지 않도록 가라앉은 기분으로 세면실문을 나서면 미안쩍은 미소를 던지는 남편이 저만치서 어성거린다. 그리고 바보스럽게도 그순간 나는 모든것을 용서하고 무마하는 바다같은 마음이 되여버린다.
치솔질을 하다보면 자신의 한 몸을 다 바쳐 자박자박 이발틈새의 찌꺼기를 청소해나가는 치솔이야말로 녀자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녀자라는 이름때문에 절제해야 하는것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돌보고 남편의 시중에 눈코뜰새 없고 시집의 뒤치닥거리에 이리저리 치이다보면 어느새 본형조차 묘연하게 닳아빠진 녀자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느라고 어느새 푸수수해진 치솔이 아닐가?
닳아빠지고 낡았다는것은 무엇일가? 그것은 아마도 녀자라는 이 고달픈 세파의 시련속에서 푸수수하지만, 그러나 미더운듯한 치솔처럼 비로소 한 녀자로서 성숙된다는 의미일것이다.
녀자란 절제와 희생의 존재인것 같아 안쓰럽지만 푸수수한 치솔의 연하고 부드러운 털을 만지면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그걸 희생으로 느끼지 않는 참다운 자비의 품같은 은은한 그 무엇이 맞혀온다.
나는 무엇이든 지나치게 골라가는 사람은 질색이지만 치솔 하나만은 지긋이 서서 열심히 골라가며 산다. 무조건 이쁜것이여서도 안된다. 치솔의 모도 너무 부드러워서는 안된다. 지나치게 부드러운 모는 나긋나긋하게 입안을 감고 돌아 처음엔 기분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발틈새를 깨끗이 청소할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센 모는 자칫 이몸을 상하므로 모는 너무 나른하지도 세지도 않은 중성이여야 한다. 지나치게 약해빠지지도 말고 도를 넘치게 영악스럽지도 않는 그런 녀자가 문득 떠오른다. 친정언니처럼 따뜻한, 누구나가 좋아할것 같은 그런 녀자. 손잡이는 미끌지 않도록 돼있어야 하고 너무 가늘지도 실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 조건외에 치솔의 머리부분은 능동적으로 움직일수 있는 정도의 굵기여야 한다. 요즘 새로 나온 머리부분의 모가 반대편으로 치킨 치솔을 보면 이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현대파녀성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겉모양도 따뜻하고 씀씀이도 일품인 치솔을 들고 집에 오는 날은 웬지 기분이 싱그럽다.
치솔같은 녀자가 되고싶다. 화려하거나 요란하기보다는 실속있는 녀자, 치솔로서의 가치와 의무를 능동껏 펴나가는 그런 치솔같은 녀자라면 어느 남자인들 마다하랴!
치솔이 이발을 위해 정성을 다 하듯 나 역시 내 손길을 원하는 내 가족, 이웃들과, 그리고 나를 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내 노력과 사랑을 다하는, 녀자라는 이름의 삶앞에 부끄럼없는 그런 녀자로 살고싶다.
어쩌면 그것은 소녀에서 녀자로, 녀자에서 엄마로 변천하는 성숙을 위한 모지름은 아니런지.
문득, 치솔질을 하고싶다. (홍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