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긋과 쿡/ 정 진 권
빙긋과 쿡/ 정 진 권
어제 오전, 김선생은 강의에 꼭 필요한 책이 한 권 있어서 버스를 타고 교보문고엘 갔다. 물론 집을 나서기 전에 지갑을 열어 보았다. 만 원짜리 다섯 장, 천 원짜리 한 장이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비싼 책 살 것도 아니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다. 책값은 한 권을 더 사게 되어 이만팔천 원이었다. 그런데 책을 사 들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친구 한 사람을 만났다. 주유소 하는 강사장이다.
“교수님께서 웬일로 여기 서 계시니?”
“음, 책 한 권 샀어. 사장님께선 웬일이시니?”
그들은 충청도 먼 골짜기 같은 고등학교의 입학·졸업 동기다. 서울에 그런 사람이 몇 있어서 매달 한 번씩 모여 삼겹살 구워 놓고 소주 한 잔씩들을 한다. 회비는 만오천 원. 만 원 먹고 오천 원은 적립을 하는데, 이 회비가 많은 거냐 적은 거냐 하는 것은 따지지 말자. 어떻든 이 모임에는 품위 없는 말도 함부로 쏟아 놓을 수 있는 무한의 신뢰와 자유가 있다. 머리 허연 악동들의 천진한 한때, 단돈 만오천 원으로 어딜 가서 이걸 사겠는가?
각설하고. 이 모임이 끝나면 강사장이 으레 김선생에게 바둑을 두자고 한다. 강사장은 4급, 김선생은 6급이다. 바둑은 잘못 두지만 관전은 좋아하는 친구가 하나 있어 부득이한 일이 없는 한 그들 셋은 함께 기원엘 간다. 전적은 7대 3으로 김선생이 열세다. 바둑이 끝나면 또 생맥주 한 잔씩을 하고 헤어지는데, 맥주값을 지불하는 횟수는 대강 강사장이 6, 김선생이 3, 관전꾼이 1 정도다. 그러니까 강사장이 김선생의 두 배는 내는 셈이다. 바둑값은 반반쯤 된다.
며칠 있으면 또 이 모임이 있다. 그러나 그때 보자며 헤어질 그들이 아니다. 김선생이 먼저
“바쁘니?”
했다. 강사장은 무심한 듯
“바쁘면 어쩌라고?”
하면서 앞장을 섰다. 그때 김선생은 문득 지갑 속에 남은 돈이 생각났다. 계산을 해 보았다. 가용 금액 이만천 원, 이만하면 둘이 소주 한잔은 하겠지 싶으면서도 적이 불안했다. 그래 말했다.
“거 순두부 자글자글 끓여 놓으니까 소주 안주로 괜찮더라.”
그러자 강사장이 한 번 빙긋 웃고는 내뱉듯이 말했다.
“더운데 무얼 자글자글 끓여?”
그리고 그는 한 마디 묻지도 않고 가까운 2층 중국집으로 휙 들어갔다. 순간 김선생은 강사장의 입가에 돌던 그 웃음, 그리고 내뱉듯 하던 그 말투가 좀 석연치 않았다.
별로 넓지도 깨끗지도 않은 중국집 홀은 한산했다. 머리에 노랑물 들인 종업원 녀석이 다가와 엽차를 따랐다. 강사장은
“돼지고기 바삭바삭하게 하나 튀기고 우선 참이슬 한 병.”
하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튀김 하나에 만이천 원, 소주 한 병에 삼천 원이니 두 병 잡고 육천 원, 김선생이 언뜻 계산해 보니 그래도 아직 삼천 원의 여유가 있다. 제발 더나 시키지 말아라. 그런데 두 병째 소주가 반병쯤 남았을 때, 강사장이 아직 반은 남은 튀김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갑자기 고량주 생각이 난다. 딱 한 병만 하자.”
물론 김선생이 동의할 리 없다.
“그만 해. 한낮에 무슨….”
사실 김선생도 고량주 한 잔 더 하고 싶었다. 소주 한 병에 고량주 반 병을 더하면 그 취기가 딱 좋다. 그러나 고량주 한 병에 오천 원이다. 그러면 마이너스 이천 원이 된다. 눈치 없는 강사장은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다면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구 벌써 점심때야. 너 짜장면 좋아하지?”
김선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오늘 집사람하고 점심 같이 하기로 했어. 곧 가봐야 해.”
강사장은 또 빙긋 웃고는 일어섰다. 짜장면은 강사장 말대로 김선생이 퍽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러나 한 그릇에 삼천 원, 두 그릇이면 육천 원, 그러면 마이너스 팔천 원이다. 서양에는 더치페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김선생은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한잔 하자고 누가 먼저 운을 뗐는데? 더구나 더 많이 얻어먹어 온 그로서는 생각만 하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다.
자, 어쩌면 이 곤경을 모면할 수 있을까? 김선생은 자작으로 소주 한 잔을 죽 비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종로에는 차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만 원짜리 한 장만 더 있으면 강사장이 하자는 대로 그래그래 하면서 다 할 수 있다. 거기다 오천 원만 더 있으면 먹든 안 먹든 고량주 한 병 더 하자며 큰 소리도 칠 수 있다. 아, 일만오천 원. 그러나 이런 가정법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순간 계책이 하나 퍼뜩 떠올랐다. 아직 삼천 원의 여유가 있지 않은가? 강사장이 자리에 없는 지금 얼른 계산을 끝내면 되는 것이다. 김선생은 피우던 담배를 천천히 비벼 껐다.
“창 밖에 뭐가 있다고 그렇게 정신없이 내다보고 있었니?”
언제 왔는지 강사장이었다. 바로 뒤에 잇따라 노랑머리 종업원 녀석이 고량주 한 병을 가져다 놓는다. 김선생이 녀석에게 말했다.
“이거 도루 가져가. 먹을 사람 없어.”
녀석이 말했다.
“네? 벌써 계산도 다 긁으셨는데요.”
김선생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강사장이 말했다.
“책값이 좀 비쌌던 게로구나.”
“무슨 소리야 그게?”
“순두부 자글자글 끓여 놓으니까 소주 안주로 좋더라며?”
김선생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단 말인가? 빙긋 웃던 그 웃음, 내뱉듯 하던 그 말투, 어째 좀 석연치 않다 했더니. 고량주 한 병이 바닥이 나자 곧 짜장면이 왔다. 강사장이 물었다.
“너 생맥주값은 있지?”
김선생은 저도 모르게 쿡 하고 웃었다. 에라, 이 능청맞은 녀석.
창 밖 길 건너에 기원 간판이 아물아물 보였다. 김선생이 물었다.
“저게 기원 맞지?”
강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근처에 호프집도 있을걸.”
두 사람의 입술에 짜장이 묻었다. 강사장이 후루룩거리는 김선생을 보고 또 빙긋 웃었다. 김선생이 빙긋 웃는 강사장을 보고 또 쿡 웃었다. 중국집 낡은 괘종시계가 한 점을 뎅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