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우수 수필

시니어문학상 2018. 2020

장대명화 2021. 4. 25. 06:43

                                                               (2018시니어문학상)지심도 동백 / 류재홍

 

 불현듯 눈을 떴습니다. 시계가 네 시를 막 지나고 있습니다.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다 결국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직 깜깜합니다. 창문을 열려다 밀려오는 바람에 놀라 얼른 닫고 맙니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바람이 차갑습니다. 양팔을 벌려가며 스트레칭을 합니다. 어떤 이는 글쓰기로 새벽을 밀어내고 누구는 독서로 하루를 연다고 하는데, 나는 이렇게 몸부터 풀어야 합니다. 한 번 망가진 몸은 좀체 돌아오지 않아서 어르고 달래가며 쓸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 동반으로 지심도에 가기로 한 날입니다. 낮부터 따뜻할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남편이 봄옷을 꺼냅니다. 조금 이른 게 아닌가 싶지만, 모른 체했습니다. 일찌감치 세탁해서 넣어둔 겨울옷을 꺼내기도 싫었거니와, 추운 것보다 더운 걸 더 못 견디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남편은 집을 나서자마자 어깨를 웅크립니다. 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버스 안을 아무리 훈훈하게 해 놓아도 자꾸만 웅숭그립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는 쉼 없이 달려 거가대교 휴게소에 다다랐습니다. 모두 전망대로 올라간 틈을 타 휴게소에 있는 옷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오리털 조끼를 본 남편이 반색하며 입어봅니다. 시중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고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가 조금은 낯설어 보입니다.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더니, 나이는 못 속이나 봅니다.

  지심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하늘에서 본 섬 모양이 마음 심(心)을 닮아서 지심도라 한다는데 마음에 와닿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이름인 동백섬이 더 정감 있게 다가옵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도 동백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왔는지 섬은 사람들로 만원입니다. 모두 봄바람에 신명이 나 있습니다. 우리도 콧노래를 부르며 둘레 길을 올랐습니다. 섬 전체를 둘러보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하니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 보았던 사량도 동백이 생각납니다. 사량도에는 온갖 종류의 봄꽃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을 지나다 무엇에 끌린 듯 멈춰 섰습니다. 나무도 땅도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는 게 묘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수많은 동백꽃이 한데 어우러져 아우라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달렸거나 누웠거나 한결같은 색이었는데, 조석으로 변하는 인간에 대한 경고 같기도 해 섬뜩함마저 들었습니다.

  이곳에서도 그런 동백꽃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렬한 힘으로 나를 잡아당기는 꽃을 볼 수도 있을 거야. 여기는 말 그대로 동백섬이 아닌가. 마음은 벌써 부풀어 오른 풍선입니다. 둘레길 초입에 조그만 카페가 보입니다. 많은 이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이 있어 나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한 무리의 붉은 꽃이 하트 모양으로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카페주인이 손님을 끌려고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아무려면 이것뿐일까. 인위적인 것에 코웃음 치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군데군데 동백꽃은 피어있었습니다. 땅에는 더 많은 꽃이 서로를 껴안고 누워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붉은빛도 분홍도 아닌 희멀건 색은 내 마음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비수처럼 꽂히는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허망했습니다. "날씨 탓인가 아니면 끝물이라 그런가, 꽃이 왜 이래." 지나가는 사람들도 투덜거렸습니다. 맛도 멋도 잃어버려 휘적휘적 걷기만 했습니다.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하트 모양의 동백꽃 앞에 섰습니다. 아직도 선홍색 그대로 환합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지막하고 여린 아기 동백이 몇 개의 꽃을 달고 바람에 하늘거립니다. 그제야 떠올랐습니다. 지심도 동백은 수백 년 이상 된 아름드리나무라고 말한 것을. 이곳은 원래 국방부 소유의 땅이라 오래된 나무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늙을 대로 늙은 몸에서 청춘의 힘을 맛보려 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새삼 지나온 산을 뒤돌아봅니다. 장대한 거목들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꽃은 그저 꽃일 뿐인데 미우니 고우니 하며 호들갑 떨게 무어냐며 일갈하는 것 같습니다. 희미하거나 선명하거나 다 같은 동백꽃이라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2020 수필 매일시니어문학상)우산 / 김 애 자

 

  희멀건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햇살이 환하면 우산은 현관 귀퉁이에서 무료한 삶을 이어간다.
  형형색색이 행렬을 이룬다. 비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들림을 받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다. 주인의 요구에 따라 반원이 되는가하면 중세의 사원처럼 뾰족하고 둥근 지붕이 된다.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지나는 눈길을 잡아채거나, 화려한 색으로 자태를 뽐내며 빗속을 누빈다. 날이 들면 찾아오는 실직의 소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우산의 걸음이 활기차다.
  우산은 임시직이다. 언제라도 불러주기만 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한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 받는 날은 높은 꼭대기에 오른 것 같다. 어께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살필 여유도 잠시 뿐, 언제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가슴을 졸인다.
  이 십 여년 시간강사를 했다. 강의가 있는 몇 달 동안만 일할 수 있는 날이다. 제 몸 하나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점포하나 가지지 못한 보따리 장사처럼 휴게실이나 도서관에서 어정쩡하게 빈 시간을 보냈다. 학기가 끝나면 선생도 학생도 아니다. 철저하게 무노동 무임금의 학문을 파는 떠돌이다. 방학이면 맑은 날 우산처럼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서 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반짝거리는 장식품이 달린 우산도 다를 게 없다. 해외 명품이 들어오거나 낙하산이라도 떨어지면 비 오는 날마저 구석으로 보내진다. 허울 좋은 간판과 가방끈이 길다는 겉모습 때문에 햇빛 뒤에 감춰진 고통과 좌절을 실감하지 못했다.
  가방끈에 맞지 않는 대우와 차별은 견딜 수 있지만 학기가 끝나면 기약 할 수 없는 다음이 불안해 착잡하다. 표류하는 난민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서류를 넣고 기다린다. 전화기로 전해지는 탈락의 소식보다 선택받기를 기다리며 날을 세우고 눈치 보는 모습이 더 처량하다. 소나기가 내리면 긴 세월동안 빛바랜 우산이라도 요긴하지 않는가. 연륜만큼 옛스러운 멋을 바라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좋아해주는 이들을 만날 때면 무던히 견뎌온 우직함에 뿌듯해진다.
  잠깐 쓰이는 것일수록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한다. 화려한 경력으로 자리를 지켜왔더라도 잠시만 보이지 않으면 새것으로 바뀌는 현실을 알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장마철을 대비하며 우산을 손질하듯 새 학기를 기다리며 단장한다. 잠시라도 비 맞는 누군가를 덮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주저앉을 수 없다.
  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가지고 싶은 소망이 온몸의 촉각을 세웠다. 떠돌이에서 안정된 내 자리를 얻기 위해 오십 중반에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임시직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박사학위가 없어 밀려났던 설움을 만회하기 위해 마음을 팽팽하게 조였다. 젊은이들 틈새를 뛰어다니며 가방끈을 더 늘리겠다고 세월을 거슬러 뜀박질했다. 주저앉으려는 몸을 채근하며 한 단계씩 조일 때마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부질없는 짓이 될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얻기 위해 고난과 흥정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주인공이 되어 내 자리에 앉고 싶다. 힘겹게 사다리를 오르는 여정은 불안한 쫒김의 연속이었지만 안정된 자리를 가지겠다는 욕심으로 온 몸을 혹사시키며 안간힘을 썼다. 한쪽 구석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뼈를 깎는 수고를 하더라도 세상의 한가운데 당당히 서고 싶다. 정상은 신기루처럼 늘 산 넘어서 넘실거렸다. 눈을 뜰 때마다 점점 더 작아져가는 내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은 길고 지루하다. 욕망의 유혹을 외면하고 살았더라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마지막 학위를 받고 난 뒤 몇 년 동안 죽음에 걸 맞는 병치레를 했다. 발은 땅을 딛고 있는데 머리는 하얗게 비었다. 초점 잃은 눈만 허공을 떠다니며 습관처럼 먹고 잤다. 자격만 갖추면 앞길이 환하게 펼쳐 질 줄 알았다. 임시직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준비했지만 현실은 결코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다. 경력이나 실력보다 금력과 연줄에 의해 쉽게 앞뒤가 바뀌었다. 꿈은 그냥 꾸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보다.
  운명은 늘 비켜갔다. 파리 목숨 같은 임시직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장대처럼 꼿꼿이 서서 쏟아지는 물 폭탄도 온몸으로 받아 흘려보낼 수 있는 우산이 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할까. 기약이 없다. 임시로 앉은 자리에서 밀리거나 잊혀 지지 않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냈다. 곱게 들림 받는 양산 팔자는 못되어도 급할 때 손쉽게 잡을 수 있도록 얌전히 기다려야 할 게 아닌가. 우산의 신분에 맞게 길들이기 위해서라면 더 힘든 여정도 견뎌야 한다. 해가 뜨면 존재조차 흩어져버릴 운명일지라도 기다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단련되는 것 또한 내 몫인 것을.
  물기 머금은 우산들이 각진 통속에 거꾸로 꽂혔다. 장대비를 맞아도 쓰임을 받았으니 뿌듯하지 않는가.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훔치며 젖은 몸을 말린다. 다음을 위해.

 

2021 2회 글로리 신춘문예 시니어 문학상 수상작

최미옥 _ 추어탕을 끊이며

김광임 _ 그리움, 섶으로 품다.

최우인 _ 아린

송종태 _ 다시 빗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