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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시절 / 김환태

장대명화 2021. 1. 22. 00:56

                                                                            그리운 시절 / 김환태

 

  사방을 산이 빽 둘러쌌다. 아침에 해도 겨우 기어오르는 병풍 같은 덕유산 준령에서 시내가 흘러 나와 동리 앞 남산 기슭을 씻고, 새벽달이 쉬어 넘는 강선대 밑을 휘돌아 나간다.

  봄에는 남산에 진달래가 곱고, 여름에는 시냇가 버드나무 숲이 깊고, 가을이면 멀리 적성산에 새빨간 봄꽃이 일고, 겨울이면 산새가 동리로 눈보라를 피해 찾아온다.

  나는 그 속의 한 소년이었다. 사발고의를 입고 사철 맨발을 벗고 달음질로만 다녔기 때문에 돌 뿌리에 채어 발가락에 피가 마르는 때가 없었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여울에서 징게미 뜨기와, 덤불에서 뱁새 잡기를 좋아하여 낮에는 늘 산과 물가에서만 살았고, 밤에는 씨름판에 가 날을 새웠다.

  어떤 날 나는 처음으로 풀을 뜯기러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이라 어저저저”하며 고삐만 이리 저리 채면 그 큰 몸뚱이를 한 짐승이 내 마음대로 제어되는 것이 나의 조그마한 자만심을 간지럽혀 주었다. 소가 풀을 우둑 우둑 뜯을 때 그 향기가 몹시 좋았다. 그 그림자 속에 소풍경 소리가 맑았다.

  나는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이웃 집 영감님이 재촉하지 않았더면 밤이 깊은 줄도 몰랐을 것이다. 집에 돌아 왔을 때는 아주 날이 깜깜하였다. 모두들 마루에 불을 달아 놓고 저녁도 먹지 못하고 걱정 속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

 하고 어머님이 꾸중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입술을 무신 어머님의 잇빨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머님은 얼굴에 더 노여움을 가장(假裝)하려고 하시나 밑에서 피어오르는 기쁨을 억제할 길이 없으신 모양이었다. 끝끝내 웃으시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칭찬까지 하셨다.

  “우리 환태가 이젠 다 컸구나.”

  머슴은 소 고삐를 받아 말뚝에 매 놓고는 일어서서 소 엉덩이를 손 바닥으로 철석 때리며

  “이 놈의 소, 오늘 포식하였구나. 어떻게 처먹었던지 배지가 장구통 같다.”

  이렇게 함부로 욕설을 하였다. 그러나 소는 머슴의 이 욕설이 만족의 표시인 것을 아는지 몸을 말뚝에 비빌 뿐이었다. 이튿날 나는 학교에서 하학을 하고 나오자 마자, 할머님이

  “어린 것이 어느새 어떻게 소를 뜯기러 다니느냐.”

  하고 말리시는 것도, 동무들이 산으로 뱁새 알을 내리러 가자는 것도 다 물리치고, 또 소를 뜯기러 나갔다.

  가을이 되자 나는 머슴을 따라 다니며 겨울 먹을 소 풀을 뜯어 말렸다. 겨울에는 여물을 썰고 소죽을 쑤었다. 그랬더니 이듬해 첫 봄에 소가 새끼를 낳았다. 나는 동생을 보던 날처럼 기뻐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

  이 시절이 나의 가장 행복하던 시절, 내 마음의 고향이 그리울 때면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소가 그립다.

 

김환태(金煥泰)(1909~1944) 문학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