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은 어떻게 쓰는가
- 수필은 어떻게 쓰는가
진실의 기록이어야 / 박연구
명색이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서인지 곧잘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나는 이럴 때 퍽 곤혹을 느끼곤 했다. 몇 마디로 수필의 정의를 내려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수필隨筆을 으레 문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들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안이한 말로 모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수필이란 걸 설명하라면 나는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설명하지 않아도 좋다면 나는 안다고 할 것이다.”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로마 말기의 종교철학자)가 ‘시간’이란 것에 대해서 쓴 《고백록》의 한 대문을 인용한 것인바 ‘시간’ 대신 ‘수필’이란 말을 넣어 나 나름의 변명을 해 보았을 따름이다.
<수필은 어떻게 쓰는가?> -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제목이다. 다시 한 번 곤혹을 느끼게 하는 청탁이라고 생각되어 사양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내가 쓰지 않는다고 하면 역시 다른 사람이 곤혹을 면치 못할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붓을 들긴 하였지만…… 아마 모르면 몰라도 시나 소설을 어느 누군가가 쓴 ‘작법’을 읽고 썼다는 말을 곧이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슨 틀[型] 같은 것이 있어 가지고 거기에 맞추어 써넣기만 하면 작품이 된다고 한다면 문학을 하등 창작행위의 소산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수필 한 편을 청탁받고 나면 참으로 망연茫然해지는 느낌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무슨 계시를 받고자 하는 구도자求道者인 양 마음이 순수해진다.
무릇 문학 작품은 테마[主題]가 잡혀야 붓을 들 수가 있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바로 그 ‘무엇’을 뜻하는 말인바, 그것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소재가 필요하다. 연극을 하려면 소도구가 필요하듯이 한 편의 수필을 쓰려면 소재를 동원해야 한다. 작자는 소재 하나하나가 주제를 표현해주는 데 유기적인 효과를 갖도록 소재 선택을 적절히 하여 ‘수필’이라는 옷감을 짜내야 하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수필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쓰기도 쉬운 글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잘못된 견해라고 본다.
작자는 고심참담 어렵게 쓰는 것이지만 독자에겐 쉽게 읽혀져야 되고 기쁨을 선사해야 된다. 무릇 예술 작품을 가까이 하는 건 어떤 희열을 맛보기 위함이기에 수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수필이 시나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쓰는 것과 씌어지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은 후자인 ‘씌어지는 글’이기에 글 첫머리에 쓴 것처럼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내포된 뜻은 자연스러움인 것이다.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말이라 하겠다. 설익은 생각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꾸민다고 해도 역시 부자연스러운 법이다. 그래서 금아琴兒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중·고교 학생들은 수필을 쓸 수 없단 말이냐고 반문이 나올 법한데, 거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글에도 반드시 분수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자기 생각의 깊이에 알맞은 글을 써야만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학생은 중학생대로 고등학생은 고등학생대로 그 연령에 그 사람의 느낌으로만 가능한 자연스러운 표현의 글을 쓴다고 하면 그 나름의 좋은 수필이 될 수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수필을 쓸 때 다 같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척’은 금물이다. 잘난 척, 아는 척하고 표현한 글을 정작 그 문제에 밝은 사람이 읽으면 얼마나 가소롭게 생각하겠는가. ‘척’하려고 하면 꾸밈이 있어서 자연스럽지가 못해 읽는이에게 개운찮은 느낌을 주어 수필로서는 실격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기록하는 문학이다. 진실은 곧 아름다움인 것이고 아름다움처럼 사람을 감동케 하는 것은 없다. 진실은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발견된다. 어느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면 마음의 창을 말갛게 닦아놓을 필요가 있다.
화가는 화가로서의 미를 추구하는 눈을 가지고 있듯이 수필가는 수필가로서의 눈을 지니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렌즈(눈)를 가지고 그 렌즈를 통해 비친 진실을 포착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이 진실을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문장이 잘 다듬어져야 할 것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으리라. 아름다운 꽃은 예쁜 꽃병에 담겨 있을 때에 한층 더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법이기에.
“미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비원뿐이랴, 유럽의 어느 작은 도시, 분수가 있는 광장의 비둘기들, 애비뉴라는 고운 이름이 붙은 길, 꽃에 파묻힌 집들, 그것들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순간 다 나의 것이 된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나의 소유물이다.”
내가 좋아하는 수필 가운데 하나인 <비원>(피천득)의 한 대문이다. 달은 하나인 것이지만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서 여러 개의 달이 될 수도 있다. 감정이입感情移入에 의한 달의 창조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비원도 보고 느끼는 사람에 따라서 소유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일단 자기가 소유한 아름다움도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되었을 때에는 그 진실의 파장波長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도 공감대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이 공감대의 진폭이 클수록 많은 사람에게 즐겨 읽히는 수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실 수필이란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쓸 때마다 어떻게 쓰면 되는 것인지 암담하였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꼭 형상화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받아 써보았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써나가는 도중에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찾아진 길을 따라 붓을 놀리게 된 것이 수필 한 편씩을 써내곤 했던 것인데, 다음에 또 다른 작품을 쓰려고 하면 앞의 작법은 아무 필요도 없고 새로운 길을 찾아 고심하게 마련이다. 기실 수필은 어떤 형식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형식이면서 쓸 때마다 새로운 작법을 요구하는 문학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