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 水 木… 今 / 서 숙
花 水 木… 今 / 서 숙
꽃요일에는 열정이 미의 화신으로 피어난다.
꽃[花]은 어디에서 왔을까. 火에서 왔을까, 아니면 化에서 왔을까. 변화하려는 염원에서 아름다움으로 현현하는 존재가 꽃이다. 짧디 짧은 한 생, 더도 덜도 말고 열흘만 활활 불탈 수 있기를… 꽃의 기원이 간절하다. 촌음을 아껴 지성으로 지고지선을 갈구한다. 삶은 무상할지니 단 한 번 사랑에 목숨을 걸어 절정의 행복을 누린다. 기쁘게 노래하고 즐겁게 춤추리. 찬란하게 한순간을 피어 장엄하게 한 세계를 열고 진하게 사랑하여 회심의 미소를 날리면서 장렬하게 막을 내린다. 봄 들녘에는 열정을 태우고 남긴 재가 소복하다.
물요일에는 세월의 은비늘이 아롱아롱 흔들리며 흘러간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 아무것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다. 잡을 것이 없으니 놓칠 것도 없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순리를 따르며 묵묵히 생명을 키운다. 그러므로 세찬 물결에 바위가 부대끼고 나무뿌리가 상하고 수달이 제 집터를 잃는다 해도 그것은 결코 물의 뜻은 아니다. 물은 오로지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무심의 못에 이르러 마침내 고요해진다. 하늘과 구름이 조용히 내려앉는 가운데 산을 물구나무 시키는 호수의 정경 앞에서 그예 세상이 고즈넉하다.
나무요일에는 꿋꿋한 마음자리가 넉넉하게 터를 잡는다.
태양과 바람과의 상생이 영구불변인 가운데, 나무는 태양에게 생명을 의탁하고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의연하여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 소나무는 발치의 진달래를 귀여워하지만, 나무들은 엄연히 거리를 지킨다. 숲 깊숙한 곳에는 신령스러운 초월의 분위기가 향훈으로 스며들어 자잘한 마음의 티끌을 스르르 사라지게 한다. 그런데 숲에 들면 조심해야 한다. 숲 밖에서와 달리 숲 속에서는 숲이 보이지 않아 자칫 방향을 잃는다. 인간 세상을 등지라는 정령들의 유혹 때문이다. 나무는 숲 속에서 숲을 응시한다.
꽃과 물과 나무.
꽃은 아름다움과 열정의, 물은 생명과 거울의 그리고 나무는 푸른 의지의 표상이다. 꽃은 생을 아쉬움 없이 소진시키라고, 물은 낮은 자세로 삶을 수긍하라고, 나무는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라고 한다. 이들을 벤 다이어그램으로 옮겨 본다. 위 동그라미는 붉은색 꽃, 왼쪽 동그라미는 초록의 나무, 오른쪽 동그라미는 파랑의 물이다. 세 개의 원이 서로 사이좋게 겹치며 세 가지 중간 색을 만들어낸다. 겹치는 의미는 때로 엇갈리지만 대체로 조화롭다. 그리고 가운데 세 동그라미가 합치는 부분은 구극(究極)의 빛깔인 검은색이다. 거기에 ‘지금, 여기’라고 적어 넣는다.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고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것, 우리의 지상 과제다.
살아 숨 쉬는 이 순간 외에 우리가 기댈 것이 무엇이 더 있는가.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알 수 없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고 공간은 되돌릴 수 없다. 경험의 집적이라는 날줄에다가 꿈과 기대를 씨줄로 직조하는 인생의 베틀 위에 우리는 올라앉아 있다. 미망이나 회한에 사로잡히지 않고 허황한 신기루에 현혹되지 않으며, 오로지 나날에 충실한 문양을 짜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원을 기약하는 진실이 채색 무늬로 나타나서 현재를 살아 미래를 연다. 황금의 무게가 오늘에 걸린다.
花 水 木의 지향하는 바를 꿈꾼다. 오늘은 꽃의 날, 변신의 기쁨을 누리리라. 오늘은 물의 날, 관조와 성찰이 나를 깊게 하리라. 오늘은 나무의 날, 고고한 탈속을 권유받는다. 그리고 지금. 불붙는 꽃처럼, 유유한 물처럼, 꼿꼿한 나무처럼 그리고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아! 아무리 해도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애석타, 어이하리.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다. 흐르는 계곡물에 제 모습을 아련하게 뒤척이는 산철쭉이 벼랑에서 곱다. 그가 물끄러미 개울물을 불리는 눈물의 의미를 새긴다.
꽃아, 너는 눈물 없이 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