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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 문춘희

장대명화 2020. 5. 14. 01:10

                                        우물 / 문춘희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집은 낮은 벽돌담을 목도리처럼 두르고 있던 기와집이었다. 그 기와집 지붕 위에 더께가 되어 앉은 이끼는 그윽한 풍치를 자아냈었다. 게다가 우물이 있어 좋았다. 우물은 마당 한편에 보조개처럼 앉아 있었다. 큰언니와 나는 자주 그 우물곁에서 놀았다. 언니와 함께 우물을 들여다보면 긴 쌍갈래머리 내 얼굴 위로 단발머리 언니의 얼굴이 찰방거렸고, 구름이며 바람들도 깔깔거리며 지나갔다.

 언니와 오빠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어린 나는 무료한 시간들을 혼자 보냈다. 우물가에는 언니가 좋아하는 해당화들이 피어 있었다. 햇살이 흰 가루처럼 떨어져 내리는 한낮의 마루에 앉아 우물을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지나갔다. 쥐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늙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지나갔고, 양은냄비를 땜질하라는, 목이 쉰 땜장이 아저씨의 목소리도 지나갔다. 바람이 불면 가끔씩 해당화 꽃잎이 붉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우물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나는 대청마루에 하릴없이 턱을 괴고 앉아 우물을 바라보면서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노을 뒤에 숨은 어둠이 슬쩍 소맷자락을 비칠 때쯤 언니가 돌아오면, 폴짝폴짝 뛰어가 언니 품에 와락 안겼다. 그녀는 그런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고등학생이던 언니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우물처럼 예쁜 보조개를 지녔었다. 게다가 속눈썹이 어찌나 길고 짙었는지 나는 늘 속눈썹 위에 성냥개비를 올려놓는 묘기를 보여 달라고 조르곤 했었다. 그녀는 틈틈이 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기도 하고 한글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면 찰박찰박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내 머리를 감겨 주기도 하고, 우물가에서 교복 블라우스를 빨기도 했었다. 달빛에 비친 블라우스는 새하얗다 못해 푸르렀다. 우물가에 앉아 빨래를 하는 언니를 지켜보는 날 밤엔 그녀가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다음날 아침엔 어김없이 요 위에다 지도를 그려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는 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루하기도 하고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두레박으로 물을 막 퍼 올리려 할 때였다. 휘청, 여섯 살 어린 몸뚱이는 그만 해당화 꽃잎처럼 팔랑 우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때마침 대문으로 들어서던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내 어린 심장은 몇 날 며칠 밤새 파닥거렸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듬느라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버지는 언니의 부주의 때문에 어린 것이 생명을 잃을 뻔 했다고 그녀를 호되게 꾸짖으셨다. 그날 밤 내내 그녀는 우물가에 앉아 서럽게 울었다.

 언니는 우리들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당시 어려워진 집안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모님을 도와 네 명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시집이나 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그녀는 집을 나가서 공장에 취직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라며 부모와 자식과의 인연을 끊는다고 했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 때문에 몇 해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린 나는, 아버지 몰래 그녀의 편지를 받느라 대문 앞에서 초조하게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곤 했다. 언니의 마음 같은 살진 보름달이 우물 속을 비출 때면 그녀가 하도 그리워서 오래 오래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언니가 시집을 가던 때는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이던 겨울이었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친지들은 결혼식 날 비가 오면 잘 산다더라.’며 부모님과 언니를 위로했지만 나는 어쩐지 불안했다. 먼 곳으로 시집을 간 그녀는 좀처럼 친정에 오지 않았다. 교통이 불편하고 거리가 멀어서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어쩌다 친정에 와서도 종일 잠만 자다 가곤 했다. 언니의 결혼 생활이 참으로 신산하다는 것을 안 것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내 머리를 곱게 감겨주던 그때의 언니보다 내가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였다. 반평생을 바람처럼 떠돌기만 하는 남편과 고되게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른들, 가슴에 대못으로 박혀 있는, 몸이 온전치 못한 큰아들 때문에 그녀는 버려진 우물처럼 점점 메말라 갔다.

 하얀 교복 블라우스의 수줍음 많던 소녀는 중년 여인이 되어 시난고난한 삶을 살았다. 어린 내게 퍼 올려도 퍼 올려도 마르지 않던 사랑을 주던 언니의 우물은 그녀의 고단한 삶만큼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찰박찰박 작은 두레박에 하얗게 퍼 올려 지던 그녀의 수많은 꿈들은 이미 쏟아진 지 오래였다. 언니의 우물에는 이제 더 이상 물이 없다. 어찌할 수 없는 습한 이끼만이 우물 안 돌 벽에 잔뜩 끼여 있을 뿐이었다. 삶이 언니도, 우물도 모두 가져가 버린 것이다.

 우물은 자기의 것을 온전하게 타인에게 내어준다. 스스로는 목이 말라도 제 목을 축이지 않고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남김없이 퍼주는 것이다. 언니의 삶은 우물의 삶이었다. 꽃다운 젊은 시절을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희생했고, 시집을 가서는 시댁 식구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러나 남은 것은 쇠잔해진 몸뿐이었다. 제 안의 물을 다 소진하고, 이제 폐 우물이 되어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 옛날 언니가 내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우물이 되어 줄 차례다. 그녀의 팍팍한 가슴을 한 두레박의 시원한 물로 적셔주어야 하리라.

 옛집이 있었던 자리를 쓸쓸하게 배회하다 돌아오는 길, 내 안에 잠시 잊고 살았던 우물 하나가 떠오른다. 나는 그리운 옛 우물을 들여다보듯 내 안의 우물을 들여다본다. 내 안의 우물 속에는 우물가로 늙은 고양이가 지나가고, 해당화가 피어 있고, 별빛이 흐르고, 하얀 교복 블라우스를 입은 눈물 같은 언니가 있다. 어디선가 찰박찰박 두레박 소리가 들려와 하늘을 보니 별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저렇게 많은 별들이 떠 있는 밤하늘이야말로 웅숭깊은 우물이 아닐까? 밤하늘 어디에선가 우 우 우 웅하는 우주적 울림이 웅숭깊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