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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에서 필연으로 / 양 미 경

장대명화 2020. 3. 6. 07:44

                     우연에서 필연으로  / 양 미 경

 

  ‘인연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바로 떠오르는 사건이 처칠과 플레밍 사이에 맺어진 세기의 인연이다.
  무대는 영국. 런던의 귀족가문 소년이 가족과 함께 떠난 시골여행지에서 시작된다. 귀족의 아이가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가 쥐가 나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시골 소년이 그를 구해낸다. 목숨을 건지게 된 귀족 소년의 아버지는 시골 소년을 불러 소원을 물었다.
  소년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소원은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집은 가난해서 공부할 여유가 없습니다.”
  시골 소년은 귀족 소년과의 극적인 인연으로 인해 런던에서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연구를 거듭하여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만들어내 노벨 의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그 소년이 바로 알렉산더 플레밍이다.
  후에 영국 수상 처칠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 국제 회의에 참석했다가 폐렴에 걸려 죽음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플레밍이 만들어 낸 페니실린을 공수해가 생명을 건지게 된다. 농부의 아들 플레밍이 처칠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구해 주었고, 폐렴으로 죽게 되었을 때 또 처칠을 구해 준 것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인연의 소중함을 담은 교과서가 되고 있다.

  우리는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친구들과 인연을 맺고, 사제지간의 인연도 맺는다. 사회적·정치적으로 인연을 맺기도 하고 신앙의 인연이 있는가 하면 사업적으로 인연을 맺기도 한다. 그런 인연의 기반 위에서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에게 문학은 소중한 인연을 맺게 해준 가교다. 2의 인생, 아니 제2의 생명을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대의 한 평범한 여자가 수필창작교실을 통해 문학이란 높은 산을 만나게 해준 고동주 스승님. 글 쓰는 게 힘들어 포기하려 했을 때 격려로서 계속 문학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 몇 분 선생님. 나는 문학과의 만남으로 집안의 자랑이 되었다. 내 이름자가 당당하게 찍힌 수필집을 그것도 3권이나 발간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첫 번째 수필집을 받고 내 딸, 장하다.”라며 눈물 글썽거리던 친정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하다.
  그렇다고 세상에 좋은 인연만 있는 게 아니다. 차라리 맺지 않음만 못한 악연도 있다. 오래전 아끼던 사람으로부터 모함을 당하여 가정이 깨어질 뻔한 위기에 처했던 적 있었다. 가족의 이해와 배려가 없었다면 너무 억울해서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잘못된 인연으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인연이라는 단어가 가진 낭만적 이미지에 도취되면 안 되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젠가 TV에서 외톨이형 은둔자를 보았다. 세상의 인연을 뒤로하고 산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을 보니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인터뷰 말미에, 세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짓는 것을 보니 안쓰러웠다. 사람은 이렇듯 인연의 연결고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얼마 전의 일이다. 아침 일찍 산청 방면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고속도로에 나 혼자라는 걸 깨달은 순간 소름이 확 돋았다. 조금 후 희미한 전조등 불빛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이지만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게 인간임에랴.
  그 하고많은 인연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과의 인연이 아닐까. 가족家族, 되뇌어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단어다. 세상의 무수한 인연들이 만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지만 영원히 함께 가야 하는 유일한 인연은 가족일 것이다. 우연으로 만나 어느 순간 필연이 되고 만 남편.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과의 인연의 끈은 내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가족이 아프면 내 심장이 아프고 가족이 즐거워하면 내 심장이 뛰며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리라.
  세상에 뚝 떨어져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필연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수월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찧고 볶고 웃고 다투면서 세월에 모가 닳아가다 보면 행복한 필연으로 귀결되는 것. 그것 또한 단련된 깊고 값진 인연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