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알 꼴리거든 / 김 윤 재
배알 꼴리거든 / 김 윤 재
세상이 그대를 아프게 하는가. 미운사람을 용서 할 수 없는가. 등에 진 짐이 무거워 주저앉고 싶은가. 이렇게 유치한 단어들이 며칠 마음속을 지배하면 그것은 이미 저수지가 홍수조절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속리산 자락에 자리한 식당에서 조껍데기 술을 마셔볼 일이다. 지에밥에 누룩과 차조를 넣어 발효시킨 술은 백미의 향이 적고 취기가 빨리 올랐다 내린다. 일반막걸리와 달리 쌉쌀하고 고소한 맛은 걸쭉하고 부드럽게 목젖을 타고 내려간다. 안주 역시 일미다. 노릇노릇 지져낸 감자, 표고, 파전은 눌린 신경을 일어서게 하고, 곰취, 곤드레, 당귀, 고사리나물은 배배꼬인 오장육부를 되살아나게 한다.
충북 사람들은 조껍데기 술을 줄여 조깐술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를 -좀 봐유- ‘이 콩깍지가 깐 콩깍지인가 안깐 콩깍지인가 ’.를 -깐겨 안깐겨-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조깐술을 조금 센 발음으로 하면 좆깐술로 들리기도 하는데 이술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봄비가 내리면 옛 동무를 불러내고, 여름이면 이웃과 뚝배기 가득 부어 즐긴다. 좋은 이들과 나누다 보면 술맛보다 말맛에 취한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이야기도 길어지는 것이다.
한두 잔 건배가 이루어지고 서 너 차례 잔이 건네지다 보면 신기한 마술에 걸린다. 마술에 걸린 이성은 현실의 슬픔과 고통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현재의 시각으로 멈춰서있게 한다. 체면치레하느냐 보이지 않던 세상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하고 평소 내지 못한 객기를 부리기도 한다. 팔자걸음으로 속리산을 향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러 제키고, 은행나무를 향해 물건을 들이대고 한줄기 시원한 분수를 뿜어대기도 한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두렵거나 무겁지 않은 것이다.
지난 가을 전국에서 모인 동기들과 속리산 등반을 했었다. 산행을 마치고 하산한 시간은 오후 다섯 시경, 모두 배가 출출했다. 저녁식사를 하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기에 조깐술로 목부터 축이자고 했다.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이 채워지고 무사 산행을 기념하는 건배 제의에 맞춰 모두 한잔씩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제일먼저 마신 친구 진석이가
-캬 직이네 이거 먼 술인데 이리도 기생처럼 착착안기노 -
그 말을 받은 순상이가
-거 맛 한번 징허네 춘향이 입술이 이리도 달댜-
나는 요염하게 화답 했다.
-이 술은 원래 조껍데기술인디 청주사람들은 줄여서 조깐술이라고 햐. 나는 조깐술에 콧바람을 넣어 말했다.
-그래? 좆깐술이라, 어쩐지 좆나게 마싯네 - 일행은 식당이 떠내려가도록 웃어 제켰다. 노르스름하던 조깐술이 음흉한 좆깐술로 격하되는 순간이었다.
조깐술이 좆깐술로 바뀌자 이름표도 직함도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체면도 가면도 훌렁 벗겨놓았다. 이루어지지 않은 꿈을 규탄하고 있었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돈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있었다. 이 때 누군가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 나왔다. 처음 가볍게 시작된 육두문자는 시간이 깊어갈수록 농익었고 그에 비례해 분위기 또한 짙어져갔다. 술잔에 달이 뜨고 이슬이 내려도 이야기에 취해 휘청댔다. 누구하나 나무라거나 못마땅해 하지 않았다. 모처럼 조깐술 한 잔 앞에서 무거운 세상을 내려놓고 있었다. 누구라는 이름대신 학창시절로 돌아가 새로운 꿈을 꾸는 듯 했다.
지금도 친구들은 날만 궂으면 전화통에 대고 좆깐술 한 잔 하고 싶다며 능청을 떤다.
오래전부터 욕은 성을 빗대어 사용됐다. 특히 남성의 성기를 빗댄 욕이 많았다. 가진 것이 없을 때 -가진 것이라곤 불알 두 쪽 밖에 없다느니- 용기 없는 사내보고 -불알만 찼다고 다 남자냐-라고 비아냥댔다. 그 두 쪽을 가진 죄로 평생 그곳에 땀이 나도록 일해야 처자식을 건사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남성들은 신세타령을 할 때 -좆나게 힘들다- 라고 한다.
사람들은 살다가 꼴사나운 일을 당하면 악의 없이 좆까네 라는 말을 내뱉는다. 이리저리 따지며 상처를 주고받는 대신 한마디 툭 내뱉으며 마음을 정리한다.
좆이라는 것은 죽었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 민항기 대가리처럼 불쑥 불쑥 솟아나는 것이 아니던가. 짱짱한 연장이 되어 서 너 마지기 논 후딱 갈아엎지 않던가. 사는 일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좆만 같다면야 무엇이 두렵겠는가. 꼴사나울 일이 무엇이겠느냐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원한 배설이 필요하듯 아주 가끔 조깐술을 핑계 삼아 서 너 마디의 욕으로 세월을 비웃어 보면 어떨까. 이것 또한 소비문화가 되지 않을까.
끝없는 욕망과 채워지지 않은 욕심, 버려지지 않은 욕심 이것을 어떻게 배설할 수 있겠는가. 고상한척 고운 말만 쓰고 살 수 있겠는가.
배알 꼴리는 일이 있는가. 세상이 그대를 아프게 하는가. 속리산에서 조깐술에 취해 볼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좆깐술 한 잔에 죽었던 그것이 불쑥 불쑥 솟아오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