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 강 형 호
모닥불 / 강호형
태초의 우주 공간은 중심도 없이 팽창하는 무한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 태양과 같은 항성이 생겨나자 그 것을 중심으로 중력장이 형성되면서 공간의 균질이 깨어지고 방향성도 생겨났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억 년이 지나는 동안 지구상에는 생명체까지 생겨서 인간과 같은 고등 동물로 진화하기도 했다.
태양은 여덟 개의 행성과 그것들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위성, 소행성, 혜성, 유성들을 거느려 태양계를 이루고 있다. 행성은 정해진 타원형 궤도를 도는데, 태양에서 가까운 행성일수록 주기가 빨라서 수성은 약 88일, 지구는 365일, 해왕성은 164.79년이나 걸려야 태양 언저리를 한 바퀴 돈다고 한다.
이 정도 규모의 태양계만도 내 상상력으로는 그 크기와 운행 질서를 가늠하기가 막막해서 우주에서 버려진 미아처럼 살아왔는데, 오늘 아침 TV에서는 5천500만 광년 밖에 있는 은하의 중심부에 있는 블랙홀의 윤곽을 관측하는데 성공했다는 뉴스와 함께 신기한 불구덩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빛이 진공 상태에서 1년 동안 이동한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물은 빛에 의해 형상화되기에 그 영상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블랙홀의 영상도 현재가 아니라 5500만 년 전의 모습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걸 어떻게 관찰해서 사진까지 찍었다는 것인지, 우주의 중심은 어디이며 끝은 어디일까를 상상하다가 불현듯 밀려드는 까닭 모를 외로움에 한참 동안 숙연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을 이용하기 이전의 원시인들은 낮에는 햇빛으로, 밤이면 달빛이나 별빛으로 사물을 보고 방위를 가늠하며 사냥으로 먹이를 구했다. 그렇게 빛에 의지해 살면서도 자연에서 발생한 불이 두려워 범접을 못하고 날것만 먹고 살다가 우연히 불에 익은 고기가 생고기보다 맛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 사냥을 하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구워 먹으면서 결속을 다지는 동안 부족사회로 발전했다고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다.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였다. 불을 무서워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모여 사는 법을 몰라서 고독했다면 현대인들이 군중 속에 묻혀 살면서도 외로워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모닥불에 대한 향수가 있다. 모닥불은 중심에 있으면서 평등한 공간을 만든다. 불은 너무 가까이 하면 뜨겁지만 멀리 하면 어둡고 춥다. 사람들은 모닥불 앞에 모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같은 거리를 두고 둘러선다. 모닥불 가에서는 서열이 없다. 모든 공간이 같은 조건하에 있기 때문이다. 인원이 늘어나면 장작 몇 등걸 더 던져 넣어 불꽃의 지름을 조금 넓히면 된다.
모닥불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구심점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동물과 차별화된 사회구조를 발전시켜 온 것이다. 모닥불이 만든 공간구조는 인간 사회를 구심점이 있는 강한 조직으로 만들었고, 그것이 인간을 지구의 지배자로 진화시킨 원동력이다.
농촌 출신이라면 누구나 모닥불에 얽힌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여름이면 참외 수박 훔쳐다가 강변 모래톱에 묻어두고 멱 감으면서 하나씩 꺼내먹고, 가을이면 콩 서리 해다가 개천가 작별에 모닥불 피우고 둘러앉아 구워 먹었다. 까맣게 거스른 콩꼬투리를 정신없이 까먹다가 검둥이가 된 얼굴들을 마주보며 깔깔거렸다. 겨울이면 논둑에 모닥불 놓고, 손 발 녹이면서 썰매다가 적신 옷도 말렸다. 학교에 가면 난로가 모닥불이었다. 장작불이 이글거리는 난로 가는 언제나 따뜻하고 정겨웠다. 초등학교 시절, 교실 난로 가에 쌓인 도시락에서는 온갖 반찬 냄새가 진동해서 허기를 부추기도 했다.
어제는 고등학교 친구 다섯이 삼겹살집에서 만났다. 드럼통에 철판을 얹고 철판 한가운데를 뚫어 앉힌 숯불화로 가에 둘러앉아 삼겹살 구워 소주 마시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현대식 모닥불 파티였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그 집을 단골로 다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네모난 식탁에는 위계질서 같은 것이 있어 자리를 잡을 때 주저하게 되지만 원탁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한가운데 있는 화로(모닥불)를 중심으로 아무데나 앉으면 된다. 모닥불은 이처럼 무리의 구심점이면서도 진실로 자기를 불살라 헌신하기에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모여든다.
어느 집단에서나 무리의 우두머리는 모닥불 같아야 하는데 요즘 우리나라의 우두머리들은 그 본분을 모르는 것 같다. 민초들만 외롭고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