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우산 / 정 진 권
비닐우산 / 정진권
언제 어디서 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집에도 헌 비닐우산이 서너 개나 된다. 아마도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서 내가 사들고 온 것들일 게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나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그래도 버리긴 아깝다.
비닐우산은 참 볼품없는 우산이다. 눈만 흘겨도 금방 부러져 나갈 듯한 살 하며, 당장이라도 팔랑거리면서 살을 떠날 듯한 비닐 덮개 하며, 한 군데도 탄탄한 데가 없다. 그러나 그런대로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덕德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주 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우산이기도 하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날 때, 가난한 주머니로 손쉽게 사 쓸 수 있는 우산은 이것밖에 없다. 물건에 비해서 값이 싼지 비싼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일금 100원으로 비를 안 맞을 수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비닐우산의 덕이 아니겠는가?
값이 이렇기 때문에 어디다 놓고 와도 섭섭하지 않은 것이 또한 이 비닐우산이다. 가령 우리가 퇴근길에 들른 대폿집에다 베우산을 놓고 나왔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 우리의 대부분은 버스를 돌려 타고 그리고 뛰어갈 것이다. 그것은 물론 오래 손때 묻어 정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100원짜리라면 아마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가의 베우산을 받고 나온 날은 어디다 그 우산을 놓고 올까봐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하루 종일 썩인 머리로 대포 한잔 하는 자리에서까지 우산 간수 때문에 걱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버리고 와도 께름할 게 없는 비닐 우산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비닐우산을 받고 위를 쳐다보면, 우산 위에 떨어져 흐르는 물방울이 보인다. 그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내는 그 통랑한 음향도 들을 만한 것이다. 투명한 비닐 덮개 위로 흐르는 물방울의 그 청랑함, 묘한 리듬을 만들어 내는 빗소리의 그 상쾌함, 단돈 100원으로 사기에는 너무 미안한 예술이다.
바람이 좀 세게 불면 비닐우산이 홀딱 뒤집혀지기도 한다. 그것을 바로 잡는 한동안, 비록 옷은 다소의 비를 맞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즐거울 짜증을 체험할 수 있고, 또 행인들에게 가벼우나마 한때의 밝은 미소를 선사할 수 있어서 좋다. 그 날이 그 날인 듯, 개미 쳇바퀴 돌 듯하는 우리의 무미無味한 생활 속에, 그것은 마치 반박자짜리 쉼표처럼 싱그러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좀 오래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퇴근을 하려고 일어서다 보니, 부슬부슬 창밖에 비가 내린다. 나는 캐비닛 뒤에 두었던 헌 비닐우산을 펴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살이 한 개 부러져 있었다. 비가 갑자기 세차졌다. 머리는 어떻게 가렸지만, 옷은 다 젖다시피 했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책가방을 든 어린 소녀였다. 젖은 이마에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나 하나의 머리도 가리기 어려운 곳을 예고도 없이 뛰어든 그 귀여운 침범자는 다만 미소로써 양해를 구할 뿐 말이 없었다. 우리는 버스 정류소까지 함께 걸었다. 옷은 젖지만, 그래도 우산을 받고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마침내 소녀의 버스가 왔다. 미소와 목례를 함께 보내고 그는 떠났다. 이상한 공허감이 비닐우산 속에 남았다. 그것도 100원으로선 살 수 없는 체험일 것이다.
나도 곧 버스를 탔다. 차가 M 정류소에 설 때였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는 데, 정류소엔 우산꽃이 만발해 있엇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딸들, 오빠나 누나를 기다리는 오누이들, 남편을 마중 나온 아낙네들일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용하게도 그를 맞으러 나온 우산을 찾아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때 나는 차창 밖으로 한 젊은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비닐우산을 받쳐들고 버스 안을 살피었다. 남편을 기다리는 신혼의 여인이었을까?
버스는 또 떠났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 번이나 버스를 그냥 보냈을까? 말없이 떠나는 버스를 조금은 섭섭하게 바라볼 그녀의 고운 눈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음 버스에선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꼭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용하게 알아보고는 그녀의 비닐우산 속으로 성큼 뛰어들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원망의 눈길과 미안해 하는 은근한 미소, 찬비에 두 온몸이 다 젖는대도 그 사랑을 식지 않을 것이다.
비닐우산은 참 볼품없는 우산이다. 한 군데도 탄탄한 데가 없다. 그러나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효용성이 있음으로 하여 두고두고 보고 싶은 우산이다. 그리고 값싼 인생을 살며,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넘어질 듯한 부실한 사람, 그런 몸으로나마 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리는 찬비를 가려 주려고 버둥대는 삶, 비닐우산은 어쩌면 나와 비슷한 데도 적지 않은 것 같아서, 때때로 혼자 비오는 길을 혼자 쓸쓸히 걷는 우산이기도 하다.
나의 노래 점수 / 정진권
대학 교양 과정에 노래 과목이 있어서 내가 수강을 한다면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노래 솜씨만 보는 교수라면 아마 한 40점 줄 것이다. 그러니까 F학점이다. 그러나 못 불러도 좋아는 하는 나를 다소나마 기특하게 생각하는 교수라면 거기다 20점쯤 보태서 그래도 D학점은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내 노래 솜씨가 40점밖에 안 된다고 불만스러워 할 형편이 못 된다. 실제로 내 노래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 40점이라는 것도 너무 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나는 우선 목이 몹시 쉬었다. 아버지를 닮아서다.
“선생님 목소리는 뜨거운 여름날 긴 손톱으로 양철 지붕 긁는 소리처럼 아름다워요. 헤헤헤.”
“자네 목소리는, 그 뭐랄까, 금이 간 오지그릇에서 된장 끓을 때 나는, 그 뭐랄까, 한국적이고도 구수한, 글쎄 그 뭐랄까…….”
음정과 박자도 퍽 불안한 모양이다.
“자네는 음정과 박자가 다 자유로워. 굳이 작곡자가 찍어 놓은 콩나물 대가리에 구애받을 게 뭐 있나?”
나는 이런 고약한 찬사를 무수히 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나는 언제나 반에서 1, 2등 하는 우등생이었다. 그러나 학예회가 돌아오면 늘 뒷전으로 밀려났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 잘 부르는 아이들 앞에서 주눅도 들었다. 이 가여운 우등생의 딱한 사정을 아셨던지 한번은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무언극無言劇에 출연시켜 주셨다. 늘 뒷전으로만 밀려나던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정말 가슴 뛰는 감격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무대가 눈에 선하다.
지난달의 일이다. 내가 속한 한 모임의 회원 20여 명이 어느 유명한 박물관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였다. 버스는 노래 가사가 자막으로 흐르는 선명한 스크린에 줄도 길고 성능도 좋은 마이크를 갖추고 있었다. 갈 때는 박물관이 어떻고 문화가 어떻고 하면서 도란도란 조용했으나, 올 때는 점심에 반주도 한잔씩 한 끝이라 노래 애호가 제현이 이 좋은 시설을 그냥 방치할 리 없다. 드디어 단골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다. 그런데 이 사회자는 노래 잘 부르는 사람 다음에는 꼭 못 부르는 사람을 하나씩 끼워 넣는다. 그는 이것이 대단히 공평한 무슨 민주적인 절차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온전히 가학 취미였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화살, 나는 당당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그럭저럭 내가 노래를 마치자 몇 사람이 뚜닥뚜닥 박수를 첬다. 나는 그 뚜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러분, 죄송합니다.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하고 정중하게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짜그르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공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이런 내가 40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면, 나는 내 도덕성을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어느 선철께서는 “너 자신自身을 알라.”고 가르치셨다. 너 자신을 알라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나에게 20점을 보태서 낙제를 면케 해 줄 그 미지의 교수에게 나는 물론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못 불러도 좋아는 하는 나를 다소나마 아는 사람이라면, 그 교수의 20점을 결코 많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들 앞에 주눅이 들던 어린 시절, 나는 집에 돌아오면 혼자 하모니카를 불었다. 와앙 하고 울리는 그 화음이 나는 좋았다. 요 얼마 전에 지하철에서 작은 하모니카를 하나 샀다. 나는 이따금 이 하모니카를 분다. 중학교에 다닐 때던가, 좀 자라서는 대나무에 부젓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어떤 때는 쉰 듯이, 어떤 때는 통랑하게, 끊일 듯이 이어지는 그 소리가 나는 좋았다. 지금도 비닐우산대 같은 걸 보면 하나 만들어서 불어보고 싶지만 부젓가락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교회에 오르간이 한 대 있었다. 예배가 없는 날, 나는 혼자 교회에 가서 그 오르간의 키를 눌러 보곤 했다. 조용히 퍼지는 그 은은한 소리가 나는 좋았다. 그리고 노래도 불러 보았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나는 한때 오르간을 한 대 샀으면 했다. 그러나 집에 피아노가 있어서 사지 않았다.
밖에서 한잔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그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 떨기 장미꽃이 여기 저기 피었네…….” 아내나 아이들은 내가 못 불러도 좋아하는 줄은 잘 알기 때문에 그런 나를 탓하는 일이 없었다. 아내는 오히려 내 틀린 박자를 정정해 주거나 조용히 따라 부르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어떻든 그렇게 한번 뚱땅거리며 쏟아 놓고 나면, 내 생활에 경쾌한 리듬이 붙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덧 피아노가 낡아서 소리가 잘 안 나게 되었다. 그러나 하모니카가 있으니 염려할 것 없다.
요즈음은 아내가 외출을 해서 나 혼자 집을 볼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나는 책상에 붙어 앉았다가 좀 골치가 아프면 부엌으로 가 먹다 남은 소주 한잔 하고 마루로 나온다. 그리고 하모니카를 불고 그 다음에는 같은 곡을 노래로 다시 부른다.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하모니카 한 번, 노래 한 번, 이렇게 섞바꾸어 몇 곡 불고 부르다 보면, 먼지 풀썩이는 내 메마른 가슴에 어느덧 물기가 돈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이 다가오고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고……, 잠시나마 정서의 부활을 체험한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노래를 못 부른다고 해서 너무 섭섭해 할 것은 없다. 좋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어느 성인은 ‘범사凡事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셨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생각해 보면, 내가 그래도 무언극이나마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퍽 다행스럽다. 20점을 더 받아 D학점으로나마 살고 있는 것도 다행스럽다. 제 자신을 알고 범사에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