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양철지붕 외딴집
빨간 양철지붕 외딴집/장난순
맞선을 보았던 아들이 몇 번의 만남 후에 아가씨와 함께 인사를 왔다. 두 사람을 처음 보는 순간 눈에 익은 듯하고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앞섰다. 내 아들이 선택한 여자라서 일까.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미 며느리로 낙점을 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사랑’이라는 말처럼 남편도 더없이 반색하는걸 보니 마음에 들었나보다. 며느릿감을 대하는 남편의 표정이 시아버님이 나를 처음 맞아주시던 때와 어찌 그리도 비슷한지 그 옛날 시아버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아들과 함께 온 아가씨의 마음도 사십여 년 전 내 생각과 같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당시 내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면소재지에서 이십 여리 길을 더 걸어가야 하는 시댁은 버스가 다니지 않는 외길이라 달리 갈 방법이 없다. 흙먼지 폴폴 날리는 비포장 길을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가자니 발가락 아프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차선로 변을 따라 나있는 길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산자락을 몇 구비 돌고 돌다보니 마을 어귀에 자리한 빨간 양철지붕외딴집이다. 시댁이 될 집이라는 생각을 해서였을까. 왠지 낯설지가 않고 정든 집처럼 느껴졌다. 처음 뵙는 어른들께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큰 대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루에 앉아 계시던 아버님이 벌떡 일어나시며 "애야 어서 오거라, 잘 왔다" 반겨 맞아 주시던 따스한 손길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대종가인 시댁은 혼인 때 전통혼례를 올리는 풍습이라 구남매 막내인 남편을 끝으로 혼례도구를 보관하지 않는다 하였다. 결혼상대는 너희들 뜻으로 결정하였어도 혼례식은 가풍을 따라야 한다는 아버님의 완고한 고집에, 시댁 마당에 초례청을 차려 전통혼례복 입고 연지곤지 찍고 혼례식을 올린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지 못하여 못내 아쉬웠었다.
대청마루 지나 사랑방을 신방으로 내주신 아버님. 엄동설한에 웃풍이 세어서 춥다며 하루 한 번 끓이는 소죽을 시도 때도 없이 끓여 온돌방을 따뜻하게 하여 주시고, 부엌의 큰 가마솥에 두레박으로 샘물을 긷는 일은 내 몫이었는데 물이 떨어질세라 가득가득 채워 주셨다.
그 후 남편이 장교군복무로 우리는 전방에서 신혼살림을 하게 되었고 이 년여 사는 동안 딸아이를 낳아 시댁으로 돌아왔다.
기차길옆 외딴집 시댁은 시시때때로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소리가 처음엔 소음으로 들려 힘들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차차 적응을 하게 되니 기적소리가 들려오면 어디론가 여행을 하고 싶다는 충동에 기찻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였다. 또래가 없는 딸아이도 딴엔 외로웠을까, 기차소리에 어느 결에 달려 나가 손을 흔들며 서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꼭 안고 함께 손을 흔들어 주곤 하였었는데… 칠팔 개월 동안 모시고 살다 직장을 따라 분가 하였지만 시아버님은 장날이 되면 딸애가 좋아 하는 주전부리를 사다 고사리 손에 쥐어주시던 정 많은 분이셨다. 명절날이나 생신날에 다녀갈 때에도 보따리 보따리에 싸서 기차정거장까지 지게에 져서 날라다 주고 되돌아가시던, 아버님의 등 굽은 뒷모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나는 아버님의 사랑을 참 많이도 받은 며느리가 아니었나 싶다.
흙먼지 날리던 도로는 이젠 포장이 되어 말끔하다. 기차 길 건너 저 멀리 보이는 강물도 유유히 흐르건만 빨간 양철지붕 외딴집은 아무도 살지 않아 낡고 허물어져 간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벽에 아버님 사진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아버님 막내며느리 왔어요. 절 받으세요!” 라고 중얼대는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시는 듯 미소 지으시는 것만 같다. 벽장문을 열어보니 빈소주병이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잡수시던 알사탕 봉지도 그대로 있다. 소주를 좋아하시던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한 잔, 소죽 끓이고 한 잔, 식사하고 한 잔, 들일하고 돌아와서 한 잔씩 하시니 됫병소주를 사오일에 다 비우시는 애주가시다. 사탕을 안주삼아 소주를 드시던 아버님을 생각하면 술안주 한번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고 생신이나 명절 때만 드나들었던 일이 회한이 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청마루에서 삐거덕 삐거덕 소리가 난다. 미처 군불을 떼지 못하였을 때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남편과 보듬고 자던 사랑방이다. 둘이 함께라면 어떠한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청춘의 시절이 아니었던가. 참으로 꿈같은 세월이었다.
방 한쪽에 시집올 때 한 땀 한 땀 매화꽃 수놓아 혼수로 가져왔던 빛바랜 액자도 그대로 있고, 추울 때 쓰시라고 떠서드렸던 털모자도 벽에 걸려 있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그 옛날을 회상하려니 허리가 휘도록 묵묵히 일만 하신 아버님 생각에 눈시울이 젖는다. 구남매 키우고 교육시켜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가는 자식들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시던 아버님이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우연일 수도 있고 필연일 수도 있다. 부부는 천생의 인연이 있어야 배필로 만난다 하여 운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자녀를 혼인 시키며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연륜 때문이 아닐 런지. 자식은 부모가 되어보아야 부모마음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하나 뿐인 아들이 결혼을 한다. 며느리를 맞이하려는 지금, 내가 새색시였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앞으로 며느리와 고부간이 아닌 모녀지간처럼 도타운 정을 나누며 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내리사랑 이라고 부모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자식들에게 되돌려 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시아버님의 온정이 느껴지는 빨간 양철지붕 외딴집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