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바라보며 / 김 홍 은
돌을 바라보며 / 김홍은
봄이 오면 고향이 그립다. 아지랑이가 아롱거리고, 살구꽃도 지고, 보리이삭이 필 때면 이 산 저 산에서 뻐꾹새가 울었다. 누구나 이런 고향은 잊지를 못한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물가에, 하얀 모래 둑을 만들며 물레방아 놀이하였다. 물가에는 예쁜 물새들도 날아 올랐다. 작은 자갈들이 깔려있는 모래 위에다 할미새는 알을 낳고 꽁지깃을 쫑긋거렸다. 알록달록한 새알을 찾으러 강변을 눈이 빠져라 헤매던 짓궂던 일도 떠오른다.
강변에는 듬성듬성 놓인 크고 작은 돌들 사이로 흐르는 물결은 반짝반짝 찰랑거렸다. 조잘조잘 흐르는 여울물소리는 돌의 언어로 들렸다. 납작한 돌로 수제비를 뜨던 기억이 생생하다. 맨발로 모래 위를 밟으면 아삭아삭하는 소리가 났다. 발바닥은 포근하면서도 간질간질함에 즐거웠다.
언덕 위로 이어진 청국밀 밭 사이 길도 아련히 그려진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는 강변에서 주운 하얀 차돌멩이를 부딪치면, 번갯불처럼 파란 불빛과 붉은 불빛이 어울려 번쩍번쩍 일어났다. 불을 나게 하여 무서움을 쫓았다.
여름이면 가끔 도시를 벗어나 고향의 넓은 바위 위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들이 총총하다. 어릴 때 바라보던 별들이다. 어느 때는 별똥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왜 이리도 지난 날이 그리울까?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지금도 어쩌다가 강변을 지나게 되면 그때의 물소리도 듣고 싶어진다. 불이 잘 일어나는 차돌멩이를 갖고 싶어 했던 작은 소망도 잊지 못한다.
차돌멩이에서 일던 불빛이 마음속에서 늘 반짝거린다. 아버지가 허리춤에 소중하게 매달고 다니시던 부싯돌 쌈지는, 어느 때고 불을 만들 수 있어 부러운 대상이었다. 손때가 묻은 쌈지에는 작은 부시와 밤톨만한 차돌멩이랑 향긋한 보들보들한 부싯깃이 담겨있었다.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불을 만들 수가 없다. 이제 생각하니 삼이라는 숫자는 천지인天地人의 이치를 가르침이다. 부시는 차돌에 부딪쳐 불똥을 일게 하여 보드랍게 만든 쑥에 불을 붙게 만든다. 쑥에 붙은 불을 이용해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유황에다 옮겨 활활 타오르는 불을 만들어 나무에다 옮겨 아궁이에 밀어 넣으셨다. 아버지의 기술은 늘 신기하기만 하였다. 이래서 나에게는 돌멩이 중에서도 차돌멩이를 제일로 생각하였다. 아마도 어른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 모른다. 인류의 조상들은 돌을 숭배하였음을 잘 알고 있다.
고향의 마을 입구에는 차돌멩이로 쌓은 탑이 있었다. 신께 행운을 빌음이다. 사람들은 이토록 차돌멩이를 귀하게 여겼다. 음력 정월 열나흘날 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모든 가정에 한 해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강변에는 많은 모양의 돌들이 있다. 이중에도 차돌멩이는 다른 돌에 비하여 하얗고 깨끗하다. 겉은 울퉁불퉁하지만 반들반들하다. 장독대를 만들 때도 강변에서 정갈한 차돌멩이를 골라다가 받침돌로 이용하였다. 돌과 돌끼리 부딪쳐도 차돌은 잘 깨지질 않는다. 어른들은 야무진 사람을 두고 차돌멩이 같다고 비유를 하기도 한다.
나는 학교에서 조경학 강의를 하던 때, 자연석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중국식 조경은 자연풍경을 이용한 오행설과 신선설을 입각한, 낭만적이고 공상적인 사색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조경 역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반하여 일본의 정원은, 독특한 축경식縮景式인 이끼와 모래로 자연을 이용한 임천식林泉式이었다. 물 대신 하얀 모래를 활용하고 있는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도 발달하였다.
물을 하얀 모래로 연상케 한다. 모래를 갈퀴로 긁어 물결 형태를 나타낸다. 물의 흐름과 물결을 모래로 상징시킴이다. 모래 위에 드문드문 돌을 놓기도 한다. 모래를 바라보면서 물소리를 연상하며 자연을 감상토록 함이다. 누가 이런 멋진 구상을 해 냈을까? 관광객들은 저마다 묵묵히 바라보며 감탄을 한다. 평면에는 돌과 모래뿐이다. 산수미의 형상을 모래와 돌로 응축하여 놓은 자연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모래 위로 물결소리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조경학시간에 일본의 축경식 조경을 모방하여 실습을 하기도 하였다. 물과 돌, 이끼와 초본을 이용한 실내조경을 꾸몄다. 한때는 수석의 아름다움에 빠지기도 했다. 바위의 풍화는 돌이고, 물에 갈리고 깎인 돌멩이는 조약돌이고 몽돌이다. 자연의 풍화는 아름답다. 풍화나 침식 등, 자연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진 여러 모양의 작은 돌은 마음을 이끈다. 수천 년 동안의 세월로 만들어진 자연을 그대로 담고 있는 수석의 오묘함은 신비롭다. 기나긴 세월의 물결로 갈리고 깎인 조약돌의 숭고한 자연미를 닮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정신이 있다. 그러나 더러는 가면을 쓰고 인생을 살기도 한다. 사람다운 사람이라면, 차돌 속에 담겨 있는 화신火神처럼 변함이 없어야 한다.
내 책상 앞에는 백두산과 바닷가에서 가져온 풍화된 작은 돌멩이랑, 물에 깎인 조약돌과 몽돌 한 개씩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일깨워 준다. 인생이 허무하고 쓸쓸함을 느낄 때는 작은 자연의 돌로부터 바람소리 물소리를 스스로 들으며 위로를 받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