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수필과비평 2019년 1월호, 제207호 신인상 수상작] 비나리 - 이형숙
"인간의 염원과 세상의 번뇌를 춤으로 승화시킨 살풀이춤은 신과 소통을 간절히 원하던 인간의 피맺힌 염원이 담긴 춤이었다. 찍고, 엇딛고, 멈추고, 다시 모으는 춤사위는 굿거리 춤이라기보다는 새 세상을 지향하는 의지가 담긴 우리의 춤이었다. 오래된 내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엄마의 비나리가되어 가슴을 흥건하게 적시던 시간이었다."
비나리 - 이형숙
깃털 같은 하얀 소복에 버선발이 단아하다. 물 위를 걷는 우아한 학 한마리를 연상케 한다. 안으로는 한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갈구하는 살풀이춤이 수묵화처럼 차분하다. 수묵화의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 무수히 많은 회색이 존재하듯 혼자서 온 무대를 에도는 춤사위에 세상 수많은 염원을 담고 있다.
국악원 명품관에서 명인의 춤을 감상하는 행운을 잡은 날이었다. 시나위가락이 마당 구석구석을 흐르고 멍석 위에선 무용수의 살풀이춤이 이어진다. 멈추어선 듯 움직이며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호흡으로 감정을 다스리며 춤을 춘다. 온몸에 흐르는 절제의 멋이 느껴진다. 대지를 밟아 다지듯 진중하게 내딛는 디딤새에는 삶의 무게가 실려 있다. 하늘거리는 수건이 허공을 향해 번민과 기원을 담아 하얀 곡선을 그린다. 두 팔을 위로 한껏 치올린 날갯짓은 날아오르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바람이리라.
지나간 날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손끝만 스쳐도 밀려오는 아픔이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살풀이춤이 하얀 수건과 함께 오래된 슬픈 날의 기억을 끄집어 올린다.
아버지의 기침 소리는 녹슨 쇳소리 같았다. 일곱 해가 넘도록 안방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는 숨이 끊어질 듯 자지러지다가 겨우 멈추곤 했다. 앉게 해드리면 덜할까 눕혀드리면 덜할까 엄마는 온갖 정성을 다하며 잠시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자꾸만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붙잡고 눈물짓던 엄마의 한숨 소리는 내게 아버지의 신음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시월 그믐께였을까. 오려 붙인 것 같은 노란 손톱달이 촛불 밝힌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무당의 춤사위와 북장구 소리가 밤을 새우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가슴 깊이 어둡게 남아있다. 아버지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애끓는 마음이 마지막 할 수 있었던 일이었으리라. 아버지가 부디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길 기원하는 간절함이었다.
깊은 밤 세상의 모든 신에게 아뢰듯 북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는 잠자는 신들을 흔들어 깨우고도 남았다. 하얀 한복을 입은 여인이 돗자리 위에서 북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다. 까만 밤 희미한 불빛 속에 날개를 펄럭이는 하얀 나비 한 마리였다. 촛불이 흔들리면 바람일까 신일까 아득해지는 가슴을 가까스로 가다듬어야 했다.
하얀 매듭을 매었다가 푸는 고풀이는 격하고 바쁜 몸짓이었다. 엄마는 비손을 한 채 셀 수도 없이 신을 부르며 이령수를 했다. 그 밤, 신은 엄마의 애달픈 울음소리를 어두운 하늘 어디쯤에서 듣고 계셨을까….
엄마의 뒷모습이 문틈으로 보였다. 거친 삶에 앙상해진 등허리가 종잇장처럼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엄마의 가슴은 아버지의 신음소리도 아홉 자식의 배고파 우는 소리도 잘게 부셔 차곡차곡 쟁이는 동굴이었다. 삶의 고뇌를 켜켜이 쌓아놓은 그 답답한 가슴 열어 보이고 싶었던 날들이 얼마였을까. 꺼질 것 같던 촛불이 바로서기를 반복하며 엄마의 염원을 함께 빌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북소리도 엄마의 이령수도 동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엄마는 하얗게 밤을 새우고도 못다 한 말이 아쉬워 동쪽을 향해 그림같이 서 있었다. 달구비가 오려는지 새벽바람 한줄기 엄마의 치맛자락을 휘감아 돌고. 밤새 두려움에 떨던 나뭇잎은 마당 모퉁이에서 뒹굴고 있었다.
부뚜막 조왕에 올려 둔 정화수를 집안 곳곳에 뿌렸다. 그리고 식구 수대로 상 위에 올려 두었던 소지에 불을 붙여 어두운 허공으로 날렸다. 간절했던 엄마의 비나리는 불꽃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무용수가 바닥에 엎드린 채 두 손을 위로 뻗어 머리를 조아린다. 무위하신 신 앞에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고백하는 슬프고도 처연한 몸짓이다. 숨소리조차 죽이며 매달리던 엄마의 눈물을 머금었다.
천근처럼 무겁게 두 팔을 들어 올렸다가 천천히 내려놓는다. 시나위 가락은 긴 한숨으로 세상의 번뇌를 다 내려놓으시던 아버지의 마지막 숨소리처럼 잦아들었다.
인간의 염원과 세상의 번뇌를 춤으로 승화시킨 살풀이춤은 신과 소통을 간절히 원하던 인간의 피맺힌 염원이 담긴 춤이었다. 찍고, 엇딛고, 멈추고, 다시 모으는 춤사위는 굿거리 춤이라기보다는 새 세상을 지향하는 의지가 담긴 우리의 춤이었다. 오래된 내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엄마의 비나리가 되어 가슴을 흥건하게 적시던 시간이었다.
이형숙 ---------------------------------------------
≪대한문학≫ 2012년 등단, 남원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노래하는 시인들≫.
당선소감
글에도 바이러스가 있다면 난 감염된 환자임에 틀림없다. 느지막한 나이에 수필이란 열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열병은 치료하기보다는 죽는 날까지 앓다가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어떤 일에도 수필만큼 진지하게 대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사색을 더하며 나 스스로에 깊이 빠지는 시간 속에서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맑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내가 만들어 놓은 작은 정원이 있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곳은 내가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나만의 정원이다. 내가 가꾸어 가는 글밭, 잡초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못난이들이 오롯이 내 손길만을 기다리는 곳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혼자 있고 싶을 때 찾아가 내가 심어놓은 것들을 다듬고 어루만지며 그것들을 키워가는 행복한 시간이다.
시들어 가던 내 정원의 꽃들이 생기를 찾고 피어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 교수님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린다. 내 글밭을 기름지게 가꾸어 갈 수 있게 도와주신 문우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 드리고 싶다.